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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라 강따라/산따라 강따라

최치원 선생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다

<2011년 2월 28일>

 

 

표지사진 - 쌍계 계곡의 서쪽 암벽에 새겨진 마애금석문

 


최치원(崔致遠)의 자(字)는 고운(孤雲)[또는 해운(海雲)이라고도 하였다]인데 서울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에 전하는 기록이 없어져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치원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자 장차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들어가 배움의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십 년 안에 과거에 붙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부지런히 힘쓰라.”고 하였다. 치원이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좇아 공부하였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건부(乾符) 원년 갑오(874)에 예부시랑 배찬(裴瓚) 아래에서 한 번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하였고,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으로 삼았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하였다. 그때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병(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하였는데, 치원을 추천하여 종사관을 삼고, 서기의 임무를 맡겼다. 그가 지은 표(表)·장(狀)·서(書)·계(啓)가 지금까지 전한다.

나이 28세에 이르러 귀국할 뜻을 가졌다. 희종(僖宗)이 이를 알고 광계(光啓) 원년(885)에 그로 하여금 조서를 갖고 사신으로 가도록 하였다. 신라에 남아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가 되었다. 치원이 스스로 서쪽에 유학하여 얻은 바가 많았다고 생각하여서 돌아와서는 자기의 뜻을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말세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으니 나가 태산군(太山郡) 태수가 되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893년)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빠져 죽으니 곧 추성군(橻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차출하여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당시 치원은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있었는데, 때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매해 기근이 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이 많이 일어나니 길이 막혀 마침내 가지 못하였다.

그 후에 치원은 또한 일찍이 사신의 명령을 받들어 당 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단 그때를 알 수 없다. 그 문집에 태사(太師) 시중에게 올린 편지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습니다. 마한 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오(吳)·월(越)을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유연(幽燕)·제(齊)·노(魯)의 지역을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해충이 되었습니다. 수(隋)나라 황제가 나라를 그르친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 중략 ~ ” 여기에서 말하는 태사 시중의 성명은 또한 알 수 없다.

치원은 서쪽에서 당(唐)나라를 섬기다가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온 후까지 모두 혼란한 세상을 만나 운수가 꽉 막히고[蹇屯], 움직이면 매번 비난을 받으니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산림의 기슭과 강이나 바닷가에서 자유롭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스스로 구속되지 않았다. 누각을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을 베개 삼고, 풍월을 읊었다.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涼寺),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 합포현(合浦縣)의 별장 같은 곳은 모두 노닐던 곳이다. 최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었다. 벼슬하지 않고 편안히 살다가 노년을 마쳤다.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 조>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 조>를 읽어보면, 최치원은 말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용연마을 쌍계 계곡에 들어서면 최치원 선생이 한동안 은거한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 있다.

 한편 홍성 장곡면과 가까운 거리에도 가야산은 있다. 서산시 해미면과 예산군 덕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금북정맥(산경표에서 말하는 금북정맥이다)상의 해발 677.6m의 봉우리가 바로 가야산이다. 가야산은 합천 가야산이 유명하다. 하지만 이 일대에서는 내포의 가야산이 유명하다. 오서산과 더불어 내포의 서벽을 이루는 가야산은 '내포의 꽃'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필자는 최치원 선생이 말년에 은거한 곳으로 내포의 가야산으로 추정한다. 그 근거는 최치원이 부성군 태수로 있었는데, 부성군은 지금의 서산시 일대이다. 서산시는 당진군과 더불어 고대에는 당나라로 떠나는 신라의 대표적인 포구였다. 남부여 당시에는 지금의 화성시 일대인 당항성이 신라의 당나라 출발지였으나, 삼한통일 이후에는 경주와 더 가까운 서산과 당진이 유력한 출발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부여 당대에는 남부여가 남조의 교류길로 삼은 곳도 이곳 서산과 당진 일대였을 것이다. 이는 국보인 서산마애불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곳에 불사(佛事)가 크게 일어났다는 것은 내포에서 대륙 남조로 출발하는 길목이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매우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였다. 따라서 귀국해서는 언제라도 당나라 사신을 맞을 수 있는 서산이나 당진 일대의 지방관 역할이 신라 조정에서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최치원에게 지금의 서산 일대인 부성군 태수를 제수한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은 말년에 정치를 혐오했다고는 하나, 당시의 선진국인 당나라 문물과 정보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내포의 가야산 일대가 은거하기에 좋았던 것이 아닐까 하고 필자는 추론해 본다.

 최치원이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했다는 것은 후대 역사서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실제 최치원은 내포의 가야산에 은거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려 때에 와서는 가야산 하면 합천 해인사가 유명하므로 해인사가 있는 합천 가야산으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론하는 것이다. 이는 이곳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용연마을 쌍곡 계곡 일대의 최치원 유적지와 더불어 묘지, 강당지, 은거지 등이 구전되고 있는 것과도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부성군 태수 재임시 사직하고 이곳 쌍계 계곡에 한동안 머물다 말년을 가야산 해인사에서 보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에는 최치원 선생의 친필 금석문이 있는 유적지가 있다. 홍성군 장곡면 일대는 남부여 부흥군들이 활동했던 예산의 임존성과 매우 가까우며 석성산성, 학성산성, 소구니석성, 천태산성들이 있어  남부여 부흥군의 성지 같은 곳이다.

 

쌍계 계곡의 유래비. 이곳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용연마을 쌍계계곡 일대는 최치원 선생이 한동안 은거했던 곳이라 전해진다. 쌍계의 서쪽 암벽에 13개의 마애금석문이 있는데, 그 중 '풍악 최고운서'와 '쌍계 최고운서'라고 새겨진 글씨가 있어 마애금석문의 주인공이 최치원 선생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용연마을 뒤쪽으로는 석성이 있고, 극락사라는 절이 있는데, 극락사 뒤쪽에 최치원 선생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유적지 안내도

 

1~13번이 마애금석문이다.

 

안내문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용연마을 쌍계계곡 전경

 

쌍계. 지금은 조그만 도랑으로 별볼일 없지만, 옛날에는 쌍계의 서쪽 마애가 아름다웠을 것으로 보인다.

 

15번 '용은별서(龍隱別墅)' 금석문. 용은 별도의 농막에 숨어 있다. 세상의 벼슬을 마다하고 조용히 여생을 지내고자 한 최치원 선생의 심정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5번 용은별서(龍隱別墅) 금석문의 뒷면. 4언 절구가 적혀 있다. 아마도 용은별서가 제목이고, 이에 덧붙인 시로 사료된다. 질응운채(質凝雲彩) 문절용린(文折龍鱗) 좌대명월(坐待明月) 취류가빈(醉留佳賓). 확실치는 않으나 대략 적어 보았다. '(하늘의) 바탕은 구름 빛도 얼게하는구나! 구름 빛은 용의 비늘처럼 찬란해지도다! 앉아서 밝은 달을 기다리는구나! 아름다운 손님(달)에 도취되어 떠날 수가 없구나!' 

 

15번 금석문에 대한 설명문

 

옛 안내판

 

부근 지형도

 

 

 

신 안내판 16번 '월협(月峽)' 금석문

 

월협. 달의 골짜기.

 

뒷면

 

설명문

 

신 안내판 11번 '취석(醉石)' 금석문

 

 

 

보이기는 한데...

 

다시 한번... 그래도...

 

설명문

 

제단. 제단에는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갈 때, 아버지가 공부 열심히 하라는 당부에 대한 답변을 적어 놓았다. 인백기천(人百己千). '남이 백을 하면, 저는 천을 하겠읍니다.' 요즘 유학생들이 새겨 들을 말인가?

 

 

 

서당에서 국수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반죽할 때 사용하던 돌이라고 한다.

 

강습소에서도 사용하던 돌일까?

 

설명문

 

신 안내판 14번 금석문. 이곳 공원에다 옮겨 놓은 듯하다.

 

단응정립(端凝挺立) 여진관(如眞官)  진윤삭성(縝潤削成) 여규찬(如珪璨). 단정히 서있는 풍경들은 정직한 관원같고, 검은 빛 윤기는 깍아 갈은 구슬 같구나!

 

설명문

 

금석문이 새겨진 바위들과 앞의 설명문 전경

 

현재 유적지 공원 부근이 최치원 선생의 은거지로 추정된다.

 

쌍계

 

쌍계 계곡 전경

 

아래로 내려가 본다.

 

여기에도 금석문이 새겨져 있다.

 

신 안내문 13번 '용암(龍巖)' 금석문으로 사료되나 확실히는 모르겟다.

 

쌍계 상류의 모습. 개울 좌측으로 금석문이 즐비하다고 하나, 확인하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쌍계 하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