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6일>
표지사진 - 함양 마천면 오도재(997m)에서 바라 본 지리산 천황봉(1915.4m)
구형왕(仇衡王)은 김씨(金氏)이다. 정광(正光) 2년(521)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 보정(保定) 2년 임오(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가락국기 구형왕 조>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奴宗), 둘째 아들인 무덕(武德), 막내아들인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禮)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 조>에는 이해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켜 이사부와 사다함 등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다고 되어있다. 이는 대가야의 멸망을 의미하며, <가락국기> 편찬자는 대가야의 멸망과 본(금관)가야의 멸망을 혼동한 것이므로 금관가야의 멸망은 <개황록>이 전하는 532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 조>에도 금관가야가 532년에 항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형왕의 치세는 42년이 아니라 <삼국유사 왕력편>에 나오는 것처럼 12년간 재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 조> 기사를 보면 구형왕은 왕비와 세 명의 아들과 더불어 신라에 순순히 항복한 것으로 나온다. 과연 구형왕은 평화적으로 가야를 신라에게 넘겼을까? <가락국기>의 내용을 보면 구형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하며 신라군과 대전을 벌일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왜 전쟁을 멈추고 사직을 넘긴 것일까? 기록은 적병의 수가 많고 아군은 적어서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기록의 이면을 중시한다. 비록 <가락국기> 편찬자가 대가야의 멸망과 본가야의 멸망을 혼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락국기 구형왕 조>의 내용까지 착오를 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내용이 본가야 멸망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면, 구형왕의 형제인 탈지이질금은 본국에 남아 있고 왕자와 맏손자 졸지공은 신라에 항복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구형왕 자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 조> 기사를 보면 법흥왕은 구형왕을 예(禮)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한 것으로 나온다. 식읍은 일정지역의 수조권(收租權) 또는 수조호(收租戶)을 말한다. 당시 식읍을 부여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 탈취한 지역은 전쟁에 공이 있는 장군을 그곳의 군주로 임명하면서 식읍을 주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본가야처럼 평화적으로 항복한 지역은 원래 그곳을 지배하던 지배층에게 부여한 경우가 있다. 법흥왕이 구형왕에게 상등의 벼슬을 주며 금관 즉 김해 지역의 식읍을 주었다면 구형왕은 본국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런데 본국에 남아 있었던 이는 형제인 탈지이질금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에 대해서는 당시 본가야 지배층 내부에서 신라의 침략에 대한 대응 방식에 대해 극심한 분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락국기 구형왕 조>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구형왕의 동생으로 보이는 탈지이질금과 구형왕의 맏손자인 졸지공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구형왕의 맏아들인 세종(世宗) 각간은 신라에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 조> 기사처럼 구형왕의 막내아들인 무력은 신라에서 벼슬이 각간(角干)에까지 이른다. 무력은 바로 삼한 통일의 명장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무력의 집안은 신라에서 삼대에 걸쳐 승승장구하였다. 따라서 무력도 삼촌인 탈지이질금과 큰형인 세종을 따라 투항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법흥왕이 김해 지역에 식읍을 준 사람은 구형왕이 아니라 구형왕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탈지이질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에 반해 구형왕을 비롯한 일부 왕족들은 신라와의 결사 항전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구전과 구전에 의한 유적만이 남아 있어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야국 제10대 구형왕은 532년 신라가 침공하자 선량한 백성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 하여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고 9만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의 제한역 아래에 와서 머물렀다. 그리고 오도재 넘어 촉동에 대궐터를 잡아 역사(役事)를 시작했으나 적을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이라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들어가 추성(楸城)을 쌓고 피란하였다. 그때 9만 대군이 머물렀던 곳을 대군지(大軍地)라 하며 구만동(九萬洞)이란 마을이 형성되었고 활개미란 곳은 활을 쏘며 무술을 연마했던 곳이다. 촉동에는 빈대궐터가 남아 있고 추성에는 석성과 대궐터, 파수대, 뒤주터 등 옛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오도재는 마천, 하동, 구례로 통하는 고갯길이었는데 구형황후인 계화부인이 올라와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로부터 성황당이 생기고 지나가는 길손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의 천왕신을 모시고 제를 지내게 되었다. <오도재 산신각 복원비명>
위 기록은 <오도재 산신각 복원비명>이다.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채록한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구형왕은 남강의 상류를 이루는 함양 마천면의 엄천강 유역까지 피난 온 것으로 나온다. 즉 지리산 동쪽 기슭의 칠선 계곡에 궁터를 마련하고 가야 회복의 염을 불사른 것이다. 기록에는 9만 대군이라 하였지만 실제는 구형왕을 따르는 본가야 전체 유민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논은 물론이거니와 밭도 부족한 엄천강 유역에서 어떻게 9만의 유민이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신라와의 결사 항전을 선택한 구형왕은 자존심을 회복하였는지는 몰라도 당시 인근의 가야 폴리스의 견제도 심했을 것으로 보여 본가야 유민들은 생존의 한계선까지 내몰렸을 것이 자명하다.
엄천강과 남강이 합강하는 부근인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는 구형왕릉으로 전해지는 적석총이 하나 있다. 구형왕릉 동남쪽에는 구형왕을 기린 왕산이라는 큰 산이 있다. 그리고 구형왕릉 계곡 아래에는 왕산사라는 절이 있었다. 조선 정조 17년(1793) 그 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나무상자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유물들은 현재 덕양전이라는 전각에 보존되어 있다.
본가야의 자존심을 지킨 구형왕! 그의 무덤은 천오백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그 영험한 기운을 내뿜으며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도재 북쪽으로 함양읍이 살짝 보이고 백운산(1278.9m)이 강건한 기상을 보이며 백두대간을 이끌고 있다.
오도재 산신각 복원비
점필재 김종직의 시비
법화산과 삼봉산 등산 안내도
지리산 능선이 보인다. 함양군 마천면 엄천강 계곡 방향.
북쪽의 함양읍과 백운산 방향
오도재 아래 휴게소에서 바라 본 지리산 천황봉
지리산 천황봉
맨 우측이 지리산 반야봉 방향이다.
천황봉 방향
지리산 능선. 아래 계곡이 바로 가야 구형왕이 가야 유민들과 더불어 은거하며 살아가던 엄천강 계곡이다.
지리산 조망 안내도
천황봉
반야봉 방면
가야 구형왕이 은거한 곳으로 알려진 칠선 계곡 입구에 위치한 벽송사와 서암정사를 둘러보고 전구형왕릉이 있는 산청군 금서면으로 향했다.
왕산은 구형왕을 기려 지은 이름이다.
금서면 건너편은 함양 유림면 소재지이다. 유림면 뒷산은 화장산(586.4m)이다.
전구형왕릉 가는 길 중간에 류의태약수터가는 길도 있다.
왕산 오르는 등산로
구형왕릉이 보인다.
본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구전되어 내려온다.
가락국 양왕릉 비석. 양왕이란 구형왕의 별칭이다. 가야를 신라에 양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 같이 구형왕은 신라와의 결사항전을 주장한 주전파로서 가야의 자존심을 지킨 왕으로 사료된다. 그에게 양왕이란 별칭을 붙인 것은 그의 행적과는 다소 모순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형왕에겐 다소 모욕적인 별칭으로 사료된다. 제고했으면 한다. 하지만 후대 구형왕의 막내 아들인 김무력 가문이 신라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김유신 대에 이르러 만개한다. 당시 가야 김씨들은 가야와 신라는 하나라는 의미로써 구형왕이 나라를 신라에게 양도하고 이 일대에 은거한 것으로 사료를 조작한 것 같다. 그러면서 구형왕에게 양왕이란 칭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구형왕릉으로 구전되어 온 이 무덤은 실제 적석총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적석총은 고구려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무덤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는 고고학적으로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다. 지리산 계곡에 수수께끼 같은 피라미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김유신 장군이 활쏘기를 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2017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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