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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백제 산성

익산 학현산성 : 백제 우소저현의 치소로 태종무열왕이 전사한 곳인가?

<2014년 2월 23일>

 

 

<표지사진 - 학제마을에서 바라본 호남고속도로 뒷편의 학현산성 전경>

 

<삼국사기 잡지 지리3조>에 따르면 오늘날 전북 익산시 금마면 일대로 비정되는 백제 금마저군(金馬渚郡)영현(領縣)은 셋이라고 한다. 소력지현, 알야산현, 우소저현이 그것이다. 1)소력지현 (所力只縣)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2)알야산현 (閼也山縣)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낭산면 일대, 3)우소저현(于召渚縣)은 지금의 전북 익산시 왕궁면과 완주군 봉동읍 일대로 추정된다.

오늘은 그 중 백제 금마저군과 우소저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성곽들을 답사하였다. 먼저 우소저현의 치소로 비정되는 학현산성에 올랐다.

 

한편 학현산성과 관련해서 필자는 다음의 <삼국사기> 기사에 주목한다.

 

태종무열왕 8년(661년) 6월에 대관사(大官寺) 우물의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의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

 

남부여 사비성을 함락시킨 태종무열왕의 최후이다. 이 기사는 매우 상징적인 기사로 무열왕이 전사한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660년에 비록 사비도성은 함락되었으나, 남부여 부흥군은 사비도성 남북에 포진하며 신라와 당나라 군대를 매우 괴롭혔다. 부흥군의 활약에 당나라 군대는 겁을 먹고 사비성에 웅크린 채 한발자욱도 나오지 않았다. 신라군만이 부흥군 토벌에 진력하였는데, 무열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금마군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사관들은 대왕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흥군의 사기가 오르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금마군(金馬郡)의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필자는 이때 금마군이란 무열왕이 이끌던 신라군이 금마저군의 영현인 우소저현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무열왕마저 전사한 것으로 추론한다. 왜냐하면 신라군의 공격루트가 우소저현의 치소인 학현산성을 먼저 함락시킨 후에야 비로소 금마저군 일대의 부흥군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후삼국 시절 왕건 또한 비슷한 루트로 후백제군을 공격한 적이 있다. 즉 호남평야로 들어가는 십자결절지인 학현산성(우소저성)을 접수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우선이다. 하지만 답사 결과 학현산성은 만만한 산성이 아니었다. 신라군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학현산성(鶴峴山城)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 동용리와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의 경계에 있는 해발 204m의 학현산(성묘산) 봉우리에 있는 석성이다. 금남정맥인 천호산 줄기가 서쪽으로 힘차게 뻗다가 문드러미재 부근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고려시대 우주 고을의 옛 폐현(廢縣)터인 새터마을을 바라보는 곳이 바로 학현산이다. 학현산은 우주 고을 북쪽에 있다하여 우북산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학현산성은 성묘산성 혹은 우북산성으로도 불린다.

학현산성은 북으로 여산과 은진, 남으로 전주, 동으로 고산, 서로 익산과 군산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의 십자결절지 상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에는 정치군사적 입지가 굉장히 높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산성의 둘레는 763m, 높이는 약 2m정도로 산봉우리에서 서남으로 흐르는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으로 답사 결과 산성의 전체적인 윤곽은 비교적 뚜렷하다. 또한 수구지 부근인 서문지의 흔적도 완연하게 보존되어 있다. 훗날 인가가 들어오면서 산성 본래의 구조를 훼손치 않고 사용한 때문이리라.

학현산성은 고려 이후에는 우주(紆州)의 치소로 사용되지 않고 읍창으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문헌비고>와 <고산군지>에 읍창은 산창으로 비봉산성에 있다고 하고 이 학현산을 완주군 비봉면에서는 비봉산이라 칭하니 바로 비봉산성은 학현산성으로 여겨진다. 학현산성이 읍창으로 사용되었는지 성내에서 고려토기와 자물쇠를 습득한 적이 있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숲이 우거져 5월부터 10월까지는 답사하기가 매우 힘들다.

 

<위치도>

 

 

수변정

 

왕궁저수지

 

 

왕궁저수지를 우측으로 끼고 들어가면 익산시 왕궁면 동용리 학제마을이 나온다. 학제마을 들 가운데서 바라본 학현산성 전경.

 

 학현산성은 호남고속도로 동쪽 건너편에 있다.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300년 된 느티나무가 나온다.

 

보호수 앞에는 막걸리 2병이 놓여 있었다.

 

폐가옥

 

보호수와 고속도로 서쪽의 학제마을

 

어떻게 답사할지 궁리해본다. 학현산성은 앞에 보이는 계곡을 감싸안은 포곡식 산성이다. 처음에는 계곡을 따라 오를까 하다가 우측 능선길을 타기로 작정한다.

 

식수로는 사용하기 어려울 듯.

 

우측 능선 길은 쓰러진 나무와 잡풀들이 엉키어 전진하기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우측능선 좌측 측면길을 살피며 답사로를 확보해 나갔다. 해발 200m에 불과한 학현산을 오르는데도 제법 땀이 흘렀다. 5월 이후 11월까지는 학현산성 답사를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개고생...

 

드디어 산성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남벽 부근.

 

 

 

산성 내부

 

 

산성 내부. 수구지 부근

 

남벽 부근

 

산성 내부는 포근한 느낌을 준다.

 

 

수구지 바로 위에는 옛날 집터가 있다.

 

이끼로 덮힌 수구지 부근의 성돌

 

수구지 아래에서 성 정면을 바라보다.

 

 

 

수구지 아래 계곡

 

수구지 위에서 바라본 성 내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좌측은 오래된 기와조각, 우측은 비교적 최근의 사기 조각.

 

우물터로 보이나 흙으로 메워져 있다. 고대에도 이 부근에 우물이 있었을 것이다.

 

집터

 

수구지 좌측 북벽으로 향하는 구간

 

북벽으로 향하는 구간

 

집터자리

 

북벽으로 석축은 이어지고...

 

 

조망이 열리나 하늘엔 미세먼지가 뿌옇고 서쪽 미륵산 부근이 겨우 조망된다.

 

북벽

 

 

 

 

 

 

 

지나온 북벽

 

장대지 오르는 길

 

북벽 부근의 평탄지. 회곽도로 추정.

 

 

장대지 아래 평탄지1

 

장대지 아래 평탄지2. 건물터였을 듯.

 

장대지 오르는 길에 괴이한 돌이 박혀 있다.

 

 

장대지 아래 북벽 부근의 회곽도

 

장대지로 생각하고 올랐으나 실제는 평탄지가 나옴. 학현산성은 전체 삼중구조로 보인다. 내외성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나 장대지로 오르는 과정에서 외성, 내성, 장대의 삼중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남벽 부근의 평탄지

 

내성 평탄지에서 바라본 장대지

 

 

남벽 부근의 석축

 

장대지 내부 전경

 

장대지 바로 아래의 평탄지. 산성의 수구는 서쪽, 장대는 동쪽, 좌우로 남북벽이 성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장대지 바로 아래의 평탄지.

 

 

산성의 남벽 부근

 

장대지 내부

 

장대지 부근의 석축. 장대지 부근이 동벽을 이룬다.

 

 

동벽의 경사도는 매우 가파르다.

 

 

동북벽 모퉁이에 조그만 대나무 숲이 나온다.

 

여기서 인근 주민분과 조우한다. 처음에는 멧돼지나 고라니인 줄 알았는데. 그 분도 매우 놀란 모양이다. 10여분 정도 담소를 나누고 헤어진다. 이곳이 산성인 줄 몰랐다고 한다.

 

 

 

 

동벽과 북벽의 경계가 되는 모퉁이

 

 

 

북벽

 

 

 

북벽 아래로 동용저수지와 동용리가 보인다.

 

북벽 아래 계곡으로 탈출한다. 남북으로 호남고속도로가 보이고...

 

북벽 아래 계곡. 애초부터 학현산성 오르는 길은 없다. 그래서 편하게 계곡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계곡 다 내려와서 얼굴에 가시나무 생채기를 입는다. 도깨비는 학현산성 답사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탈출 후 돌아본 학현산성 정상부

 

동용리 전경

 

이 길을 따라 원점 회귀한다.

 

하산길로 삼은 이쪽 계곡길보단 처음에 올랐던 능선길이 더 낫다. 물론 오십보백보이지만...

 

동용리 들어가는 계곡 입구 우측에 학현산성이 있다.

 

원점 회귀 후 바라본 학현산성 계곡 입구. 폐가옥도 보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