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3일>
<표지사진 - 익산 토성의 남문지 부근>
익산 학현산성 답사를 마치고 익산 토성으로 향했다. 익산 토성은 보덕성으로도 불린다. 그 연유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문무왕 10년(670) 여름 6월에 고구려 수임성 사람인 대형 검모잠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보고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 등을 신라에 보내어 슬피 아뢰었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올바른 도리이니, 오직 대국에게 이것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을 보았지만, 지금 우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맞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는 것은 변방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머물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사찬 수미산을 보내여 안승을 봉하여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4년(674) 가을 9월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670년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 왕족인 안승을 고구려 유민 화합책으로 백제 고토인 금마저에 살게 하고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674년 자신을 덕에 보답하라는 의미로 보덕국을 하사하고 그 나라 왕으로 삼는다. 하필 고구려 왕족을 백제 땅인 금마저를 다스리며 살게 한 연유가 무엇일까? 신라 입장에서 이이제이란 말인가? 그러다가 만약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합세하여 반란이라도 도모한다면 큰 일이 아닌가?
필자는 이러한 연유를 문무왕의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최후와 연관지어 본다. 필자는 <익산 학현산성 편>에서 태종무열왕이 금마군 땅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론하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무왕에게 금마군 즉 금마저 땅은 불길한 곳이었을 것이다. 특히 금마저는 백제 무왕의 고향으로 반신라 감정이 짙었으리라 사료된다. 따라서 금마저는 신라 왕족이 다스리기 보다는 고구려 왕족인 안승에게 맡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렇지만 역사는 문무왕의 판단이 틀렸음을 지적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보덕성에서 반란의 징후가 포착된다. 어쩌면 신라 조정에서는 백제 유민들이 안승에게 귀의하여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드는 것이 두려워 사전에 이를 봉쇄하려고 반란의 혐의를 덮어 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자 신라 조정에서는 안승을 서라벌로 소환한다.
신문왕 3년(683) 겨울 10월에 보덕국왕 안승을 불러 소판(蘇判)으로 삼고, 김씨(金氏) 성을 하사하였다. 서울에 머물게 하고 멋진 집과 비옥한 밭을 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은 안승에게 멋진 집과 비옥한 밭을 하사하였지만, 실제는 인질로 삼고 보덕국을 폐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반란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안승 조카 대문을 죽인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반란을 막진 못했다. 실복이 보덕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신문왕 4년(684) 겨울 11월에 안승의 조카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란은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문이 죽는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살해하고 읍성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장사(將士)들에게 그들을 토벌하게 하니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가 당주 핍실(逼實)이 여기서 죽었다. 읍성을 함락시키자 주민들을 나라 남쪽의 주군(州郡)으로 옮기고, 그 지역은 금마군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대왕(神文大王) 때에 고구려의 남은 적(賊)인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그를 토벌할 것을 명하고 김영윤을 황금서당 보기감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열전 김영윤 조>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이로써 보덕국은 망하게 된다.
그렇다면 최초 백제 금마저군의 치소였던 익산 토성은 안승의 보덕성으로 바뀌었다가,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된 후에는 보덕국이 사라지고 그곳에 다시 금마군을 설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반란에 참여한 주민들은 정도의 차이에 따라 보덕국 남쪽의 주군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보덕국, 보덕성, 금마저군, 금마군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의 해석에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익산 토성의 둘레가 약 690m인 점을 감안하면 이곳이 최초의 금마저군 혹은 금마군의 치소였다는 것은 자명하다. 익산 토성에서는 '금마저'가 좌서양각된 평와가 출토된 적이 있다.
한편 익산 미륵산성이나 익산 도토성 또한 금마저군의 치소가 될 수 있다. 미륵산성은 백제 무왕이 초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된 보덕국이 허물어진 미륵산성을 수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도성의 방어체계를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적인 방어체계를 형성하였고, 보덕국이 고구려 유민의 나라임을 감안한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금마저'라는 명문 기와가 미륵산성, 도토성, 익산토성에 산재해 있는 연유가 그 까닭이리라.
남쪽 금마면 서고도리 벌판
남문지 부근
말은 익산 토성이지만, 후대에 남문지 부근을 석축으로 수축하였다.
동쪽으로 금마면 소재지 전경이 보인다.
서벽구간
북벽구간
성 내부
동벽구간
남벽구간
남문지로 향하는 남벽구간
어느덧 성 주위를 다 둘러보았다. 남문지가 보인다.
남문지 부근
남문지 아래
성문터
수구의 흔적
보너스로 토성과 가까이 있는 익산 쌍릉을 찾았다. 익산 쌍릉은 전설상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기준)의 묘라고도 한다. 준왕은 마한 땅에 들어와 마한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주한씨의 시조묘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고학상으로 익산 쌍릉은 부여 능산리 고분들과 형식이 유사하여 백제 왕릉으로 추정된다. 익산은 백제 무왕으로 유명한 서동의 고향이다. 따라서 익산 쌍릉은 익산지역에 미륵사와 왕궁을 세우고 천도까지 꿈을 꿨던 무왕과 그의 영원한 연인인 선화공주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대왕릉. 과연 백제 무왕의 무덤일까?
기자조선의 왕계는 원래 기씨이다. 기씨는 은나라로부터 하사받은 성씨다.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망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한다. 당시 조선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북경 근처였다. 지금의 북경과 개봉 중간에 있던 춘추전국시대의 중산국도 기자의 후예가 왕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자조선이 위만에게 망하자, 그 마지막 왕인 기준이 마한으로 들어와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청주한씨가 유래되었다는 것이 종친회의 주장이다. 그런 연고로 익산 쌍릉은 기준왕의 무덤으로 전해진다.
대왕릉과 소왕릉은 조금 떨어져 있다. 사후 무왕과 선화공주는 이별한 것일까?
소왕릉. 과연 신라 선화공주의 무덤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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