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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경상도)/상주,군위

군위 위성리산성 더보기
상주 월로리산성 : 신라 음리화현의 치소 더보기
상주 남산고성 : 고령가야국의 도성이자 신라 고동람군의 치소인가? 더보기
상주 이부곡토성 : 고대 사벌국의 왕성인가? 더보기
군위 성제산성(성리산성) : 신라 모혜현의 치소인가? 더보기
상주 봉황성 : 의성 소문국으로 들어가는 관문 낙동강과 위강의 이수가 합류하고 속리산, 일월산, 팔공산 등 삼산의 지맥이 한곳에 모인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일대를 일컬어서 삼산이수 혹은 이수삼산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봉황성을 중심으로 낙동강과 위강이 좌우로 흘러내려 동서남 삼면이 강이고, 북쪽은 영양의 일월산이 내려와 비봉산이 되었고 서쪽의 강건너 나각산은 속리산이 동남으로 이백리를 뻗어 강에 다달아 멈춰서면서 솟아 올랐고 동쪽의 토봉 일명 쉰등은 팔공산이 군위에서 위강과 같이 북으로 역류를 해서 끝을 맺은 지역으로 한마디로 강은 대강이고 산은 모두 명산이다. 봉황성은 봉황대 북편에서 동으로 위강 절벽까지 건너막은 토성으로 성은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쌓은지는 알수가 없으나 봉황성 절벽에는 임진왜란때 피난을 했다는 전설이 담긴 양처사굴이, 북.. 더보기
상주 견훤산성 더보기
상주 화령고성 : 신라 답달비군의 치소 신라가 삼한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백두대간 이서의 삼년산성(충북 보은)과 금돌성(경북 상주)의 축조라고 할 수 있다. 삼년산성은 고구려와 백제를, 금돌성은 백제를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었던 유력한 신라의 교두보였다. 5C 중반경 신라는 당시의 자연 국경선인 백두대간을 넘어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특히 백두대간 중에서 해발고도가 제일 낮은 중화지역에 주목하곤 5C 후반 이곳을 전격 장악한다. 그리곤 중화지역 북쪽에 삼년산성을, 남쪽에는 금돌성을 쌓아 중화지역이 고립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오히려 이후 공격의 거점이 된다. 삼년산성과 금돌성은 양수겸장의 요지인 셈이다. 그럼 중화지역이란 어떤 곳인가? 백두대간 중에서 해발 고도가 제일 낮아 고대 동서.. 더보기
상주 중모고성 : 신라 도량현의 치소 신라가 삼한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백두대간 이서의 삼년산성(충북 보은)과 금돌성(경북 상주)의 축조라고 할 수 있다. 삼년산성은 고구려와 백제를, 금돌성은 백제를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었던 유력한 신라의 교두보였다. 5C 중반경 신라는 당시의 자연 국경선인 백두대간을 넘어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특히 백두대간 중에서 해발고도가 제일 낮은 중화지역에 주목하곤 5C 후반 이곳을 전격 장악한다. 그리곤 중화지역 북쪽에 삼년산성을, 남쪽에는 금돌성을 쌓아 중화지역이 고립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오히려 이후 공격의 거점이 된다. 삼년산성과 금돌성은 양수겸장의 요지인 셈이다. 그럼 중화지역이란 어떤 곳인가? 백두대간 중에서 해발 고도가 제일 낮아 고대 동서.. 더보기
상주 금돌성 : 삼한통일의 초석을 놓은 신라의 거대 기념물 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적혀 있다. "태종 무열왕 7년(660) 여름 5월 26일,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천리에 달하는 병선을 이끌고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왔다. 21일,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려 한다.'고 말했다. 법민은 '우리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이 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대장군의 도착 소식을 들으신다면, 틀림없이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라도 달려 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더보기
상주 병풍산성 : 낙동강 중류 연안의 가야 폴리스 사벌국을 지키던 성 에 따르면, '상주는 첨해왕 때(247~261년) 사벌국을 빼앗아 주를 만들었고, 법흥왕 11년(524년)에 처음으로 군주를 배치하여 상주라 하였으며, 진흥왕 18년(557년)에 주가 폐지되었다가, 신문왕 7년(687년)에 다시 주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109보였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상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에 따르면, '첨해왕(沾解王)이 재위하였을 때, 사량벌국(沙梁伐國)이 전에 우리에게 속하였다가 갑자기 배반하고 백제로 돌아갔다.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망시켰다.'고 한다. 에 따르면, 사벌국은 사로국과 백제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3세기 중반 무렵 사로국의 석우로가 이끈 군대에 정복당하고 멸망한다. 오늘은 사벌국의 중심지인 상주의 병.. 더보기
상주 성산산성(견훤성) : 후백제 견훤의 꿈이 서린 곳 상주 중화지역 방문 보너스로 성산산성과 청계사를 가기로 마음 먹었다. 49번 국지도를 타고 화북면 방향으로 가다가 화서면 하송리 송내마을 부근에서 오른쪽 계곡으로 가면 청계사가 나온다는 이정표를 보고 따라 들어가면 된다. 성산산성에 대해서는 상주시 홈페이지 글을 인용한다. 성산산성은 화서면 하송리와 화남면 동관리에 위치한 고성으로, 일명 견훤성 또는 대궐터라고도 불린다. 하송리와 동관리 사이, 해발 873m 고지의 남쪽에 있는 해발 710m 고지에서 746.3m 고지로 이어지는 능선과 그 서쪽 사면에 축성된 둘레 3340m의 토석성이다.  해발 873m 고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에 이 성의 동쪽 성벽이 축성되었고, 746.3m 고지에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의 북쪽을 안 대궐터, 그  남측을 바깥 대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