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9일>
<표지사진 - 상주 화서면 봉촌리 봉강마을 남쪽 앞산 산정에 위치한 화령고성 전경>
신라가 삼한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백두대간 이서의 삼년산성(충북 보은)과 금돌성(경북 상주)의 축조라고 할 수 있다. 삼년산성은 고구려와 백제를, 금돌성은 백제를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었던 유력한 신라의 교두보였다.
5C 중반경 신라는 당시의 자연 국경선인 백두대간을 넘어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특히 백두대간 중에서 해발고도가 제일 낮은 중화지역에 주목하곤 5C 후반 이곳을 전격 장악한다. 그리곤 중화지역 북쪽에 삼년산성을, 남쪽에는 금돌성을 쌓아 중화지역이 고립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오히려 이후 공격의 거점이 된다. 삼년산성과 금돌성은 양수겸장의 요지인 셈이다.
그럼 중화지역이란 어떤 곳인가? 백두대간 중에서 해발 고도가 제일 낮아 고대 동서 교통로의 핵심 지역이 바로 '중화지역'이다. '중화지역'은 고려시대 '중모현'의 '중'자와 '화령현'의 '화'자가 결합하여 생긴 말이다.
고대 중화지역은 신라의 답달비군과 그 영현인 도량현(통일신라 땐 도안현)이 있던 곳이다.
1) 고려 '화령현'은 신라의 '답달비군'이다. 답달비군의 영역은 오늘날 상주시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 일대로 추정된다. 면 이름 앞에 모두 '화'자가 들어가고 나머지는 방위를 지칭하는 동서남북을 사용하는 것이 특색이다. 답달비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곳은 상주시 화서면과 화동면의 경계상에 있는 원통산의 서편 자락에 소재하고 있는 '화령고성'이다. '화령고성'은 '노고산성'으로 일컬어진다. '화령고성'은 고려 때 이름이고, 신라 때 이름은 '답달비성'이다.
2) 고려 '중모현'은 신라의 '도량현'이다. 도량현의 영역은 상주시 모서면과 모동면 일대이다. 면 이름 앞에 모두 '모'자가 들어가고 역시 방위를 지칭하는 동서를 사용하였다. 이곳의 치소는 상주시 모서면 도안리 역마루(조선 초기까지 상평역이 있었다)마을과 모동면 덕곡리 안평마을 경계에 있는 중모산의 산정을 테뫼식으로 축조한 '중모고성'이다. 중모고성의 둘레는 620m 정도라고 한다. '중모고성'은 '안평산성' 혹은 '기병산성(騎兵山城)'으로 불린다. '중모고성'은 고려 때 이름이고, 신라 때 이름은 '도량성' 혹은 '도안성'이다.
필자는 중모고성에 이어 상주시 화서면 봉촌리 봉강 마을 남쪽 산정에 위치한 화령고성을 답사했다. 화령고성 주변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즐비한데, 과거에는 땅꾼을 가장한 도굴꾼이 설쳤다고 한다. 신라에서 이곳 중화지역으로 파견된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참고자료 (상주시 화서면사무소 홈페이지 인용)
1) 화령고성
봉촌리 산14번지 일대인 율림리와 봉촌리 사이에 해발 400m의 앞재에 있는 둘레 635m의 성이다. 북쪽 성은 석성(石城)이고, 남쪽 성은 토축(土築)했다. 성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 높이가 얼마라고 추정하기는 곤란하다. 성의 내부 남북의 길이는 가장 넓은 곳이 약 100m, 동서의 폭은 약 285m의 긴 원형이다. 성 안에는 우물의 흔적이 한 곳 있고, 저수시설이 두 곳 있다. 『상산지』 고적편은, “화령현 남쪽 7리 되는 장림촌(長林村) 뒤에 있는데, 석축이 1리에 불과하지만 신라. 고구려. 백제가 싸울 때 이 성을 쌓고, 부근 백성의 식량을 보관하여 적이 오면 성에 들어가서 지키고, 적이 가면 나가서 농사일을 하였다.”라고 전한다. 『조선학보 103집』은 「조선성곽 일람」에서, 이 성이 560년 경 축성한 것으로 보고 성 높이 1.5~3.6m. 성 길이 630m. 성벽 폭 0.9~1.5m인 석축성(石築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상주지(1990)』는 노고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름의 출처는 알지 못한다. 산성의 북동쪽에는 봉촌리 고분군이, 남동쪽에는 율림리 고분군이 있다. 이 성에 전해 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한 장수가 남매를 두고 살았는데, 딸은 힘이 장사이지만 아들은 딸만 못하였다. 둘은 내기를 하기로 하여 아들은 서울을 다녀오도록 하고, 딸은 앞산에 성을 쌓기로 하였다. 아들이 서울을 갔다 오면서 보니 누이는 벌써 성을 다 쌓고 마지막 돌을 치마에 싸서 옮겨 놓는 중이었다. 내기에 진 아들은 부끄러워 자결을 하였다고 한다.《근래 이 성을 ‘노고성(老姑城)’이라고 기록한 곳(『尙州誌』)이 있다. 그러나 상주지역 옛 향지에서 이러한 지명을 사용한 기록이 없고, 현지 지형도 또한 일치하지 않는다. ‘노고(老姑)’는 옛 우리말에서 ‘할미’를 의미한다. ‘할미’는 ‘큰 산, 높은 산’을 뜻하는 ‘한 뫼’와 소리가 같아서 ‘할미’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뜻이 같은 ‘노고(老姑)’를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할미’를 지명으로 사용할 때는 ‘장봉(長峰)’, ‘수봉(首峰), 혹은 수리봉’일 경우에만 땅이름으로 쓰인다. 그러나 이 성이 있는 곳은 낮은 야산이다. 그러므로 『상산지』가 전하는 대로 ‘화령고성’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봉촌리고분군①
봉촌리 산24번지에 있다. 봉촌리 고분군①에서 북서쪽, 전성 마을에서 동쪽이며 보면 해발 475m인 야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능선이 연결되어 있다. 고분들은 이 능선의 북서 사면이며 해발 310~340m 능선 위에 밀집분포 하는데, 확인된 것만도 30여 기에 이른다. 구릉의 끝부분인데 마을과 닿는 부위에는 아랫부분 폭(底徑)이 5m 내외인 봉토분이 여러 기가 남아 있다. 이 중에서 한 기는 할석(割石)으로 쌓은 4벽과 개석(蓋石)이 드러나 있는 수혈식(竪穴式) 석곽묘로 추정된다. 능선을 따라 올라 가면 봉토가 유실되고 석렬(石列)이 드러난 고분들이 밀집분포 되어 있다. 길이가 3m 내외. 폭이 1m 미만인 수혈식 석곽묘인데, 장축은 주로 동-서방향이다.
3) 봉촌리 고분군②
봉촌리 고분군②는 동쪽에 있는 해발 569.9m인 야산에서 흘러내린 지릉(支陵)의 해발 350m에서 420m에 이르는 능선 위에서 주로 발견된다. 남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이 능선의 정상은 해발 528m인 야산인데, 고분이 분포하는 가장 높은 곳에는 아래부분 폭(底徑)이 12m. 높이가 1.5m 정 도 되는 봉토분 2기가 남아 있다. 주변에는 아래 부분 폭이 4~5m 정도 되는 봉토분도 다시 관찰되며, 지표에는 소형 석곽묘의 벽석으로 추정되는 석렬(石列)들도 많이 나타나 있다. 또 이 주변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들도 다시 채집된다.
4) 율림리고분군
율림리 산15-1번지에 있다. 화령고성(化寧古城)의 동남쪽에 있다. 원통저수지의 남쪽으로 사리골을 끼고 있는 두 구릉 일대에 밀집분포하고 있다. 경사가 완만해 지는 해발 350m 지점부터 150여 기 내외의 중. 대형 분이 있다. 고분들은 인두대(人頭大)의 할석(割石)과 자연석을 사용해 길이 3m 내외. 폭 70cm 내외인 석곽묘가 대부분이다. 이들 중에는 개석(蓋石)이 여러 매 덮혀 있는 것도 보인다. 또 구릉의 말미에는 노출된 형태로 보아 토광묘(土壙墓)로 생각되는 것도 몇 기 있다. 봉분은 직경 10~15m. 높이 2~3m인데, 대부분 도굴되었다. 주위에는 삼국시대 토기조각들이 보이는데, 주민들은 금제 귀거리가 수습된 적이 있다고 한다.
5) 장림역터
장림에 있는 역터.『상주목읍지』는 화령에 있는데 주의 서쪽 55리의 거리라고 하였다. 동으로 낙서역까지 20리, 서쪽으로 보은 원남역까지 50리이다. 중마 2필과 짐 싣는 말 5필이 있고, 역리 187명. 남종 7명이었다. 조선시대 유곡도(幽谷道) 찰방(察訪)에 딸린 장림역이 었으나 고종건양 원년(1896)에 폐지되었다. 고려 때는 경산부도(京山府道)에 속한 역이다. 경산부도(京山府道)는 25역(驛)을 관장하니 안언(安堰). 답계(踏溪)<경산(京山)>. 안림(安林)<고령(高令)>. 수향(水鄕). 연정(緣情)<팔거(八紺)>. 설화(舌火)<화원(花園)>. 무기(茂淇)<가리(加利)>. 금천(金泉)<금산(金山)>. 속계(屬溪)<황간(黃澗)>. 장곡(長谷)<지례(知禮)>. 순양(順陽)<양산(陽山)>. 토현(土峴)<이산(利山)>. 이인(利仁)<안읍(安邑)>. 증약(增若)<관성(管城)>. 작내(作乃)<지례(知禮)>. 낙양(洛陽). 낙산(洛山)<상주(尙州)>. 회동(會同)<영동(永同)>. 원암(猿岩). 사림(舍林)<보령(報令)>. 추풍(秋風)<어모(禦侮)>. 상평(常平)<중모(中牟)>. 안곡(安谷)<선주(善州)>. 장령(長寧)<화령(化令)>. 부상(扶桑)<개령(開令)>이다.
상주시 화서면 봉촌리 봉강마을 초입 직전에 바라본 원통산(596.9m).
화령고성 전경
원통산
봉촌리 앞재마을. 앞재마을은 한자로는 전성(前城)으로 표기한다. 앞에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재'란 '성(城)'을 뜻하는 우리 고유어다. 후기 중세어까지만 해도 ‘재’는 ‘성(城)’을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앞재마을은 마을 전체가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령고성이 신라 답달비군의 치소로 이미 천오백년이 넘은 축조물이고, 훗날 고려시대 이후 평지성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성터가 남은 듯하다. 화령고성을 '노고산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노고산성은 전성(앞재)을 말하는 것으로 추론된다. 노고산성은 식량을 저장하고 지키기 위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식량을 산성보다는 평지성에 비축하는 것이 노고가 덜했을 것이다. '노고성'의 유래는 '합미성'의 유래처럼 곡식 창고 역할을 겸한 성으로 이해된다. 이곳 노고성도 오누이 축성설화가 전해져 오는데, 화서면사무소 홈페이지에 의하면 오기일 수도 있으나, 성의 주인이 교체되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일 수도 있겠다.
<노고성의 유래>
전국에는 합미성, 합미산성, 할미산성, 노고산성, 노고성 등으로 불리는 많은 산성들이 있다. 이러한 이름의 산성들은 모두 인근 지역의 식량을 저장한 기지성이다. '합미성(合米城)'의 한자를 풀이하면 '쌀을 모아둔 성'이란 의미다. 그런데 합미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페성이 되고 '합미'라는 발음은 '할미'라는 말로 와전되어 할미성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후세 지명을 기록하던 사람들이 할미성을 한자로 고치면서 '할머니 성'이란 의미의 '노고성(老姑城)'으로 채록했다. '늙은 시어머니'라는 '노고(老姑)'를 성의 이름으로 기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고성은 합미성과 같은 의미를 지닌 성이다. 그리고 노고성에는 대개 어머니나 시어머니가 심판이 되어 오누이나 부부가 내기를 겨루는 축성설화가 따라 다닌다. 혹 산성에 '노고'라는 이름이 있다면 할미성 즉 합미성으로 해석하여 성의 기능이 식량 창고 역할을 겸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봉촌리 마을회관에서 화령고성 오를 궁리를 해본다.
원통산(圓通山). 원통산은 자양산 혹은 우산(牛山)으로도 부른다. 산꼭대기에 무쇠로 만든 작은 철마가 있었다고 한다. 한자는 다르지만 원통산은 한글음 그대로 동학교도들의 원통(冤痛)함을 간직하고 있다. 원통산 서쪽 아래 골짜기는 '원팅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 이 곳에 상산 김씨 재실(祭室)이 있는데, 재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한 때 은거하던 곳이 있었다고 한다. 한말 당시 동학은 불법인지라 원팅이에서 동학교도들이 많은 피를 흘렸다고 한다. 앞재마을 이장님은 원팅이에 최시형 선생의 며느리 묘가 있었는데, 언젠가 동학교도들이 이장했다고 전언해주신다.
앞재 마을 앞의 화령고성. 필자는 농원 사잇길로 올랐는데, 수확시에는 주인에게 허락을 받는 것이 좋겠다.
화령고성 오르는 도중에 바라본 백두대간 봉황산(740.8m). 상주시 화서면의 진산이다. 화령고성의 정북방향에 있다.
봉황산 좌측으로 충북알프스로 불리는 구봉산(876.5m)이 보인다.
서쪽으로는 팔음지맥의 천택산(683.9m)이 보인다. 팔음지맥은 금강의 지맥인 보청천과 초강을 크게 남북으로 나누는 산줄기이다. 고대에는 이곳 중화지역에서 백제로 가는 보청천로와 초강로를 나누는 산줄기이다. 대회전 이후 신라와 백제의 전투와 교류는 대부분 팔음지맥을 따라 이루어졌다.
봉황산
구병산과 봉황산
봉황산과 전성(앞재)마을
천택산
농원이 끝나는 지점 민묘에서 봉황산을 바라보다.
3분여 오르니 화령고성 북벽의 석축이 눈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이장님 말씀에 따르면 원통저수지를 만들때 이곳 고성의 돌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다고 한다. 그땐 고장의 문화유적보단 먹고 살기가 바쁜 시절이니 문화재 보호란 의식이 박약했다고 한다.
북벽 부근의 회곽도
중모고성과 화령고성은 규모나 축조방식이 거의 똑같다. 쌍둥이 성이다. 산성 둘레가 화령고성이 635m, 중모고성이 620m로 비슷하다.
북벽에서 동벽, 동벽에서 남벽, 그리고 서벽으로 산성을 답사했다. 북벽과 동벽 모서리 구간.
북벽과 동벽 모서리 구간 아래.
동벽 아래 원통저수지. 저수지 축조 때 이곳 산성의 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동벽 구간
나무 사이로 원통산과 원통저수지가 보인다.
동벽은 짧아 어느새 남벽 구간으로 들어온다.
석축의 흔적
장대지를 올려다 본다.
장대지로 오르다.
산성 아래
이장님은 6~70년대에는 화령고성이 국민학생들의 소풍지였다고 한다. 화령고성 정상부 평탄지는 매우 넓어 초등학생 천명 정도는 소풍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민묘들로 가득하다.
원통산
넉넉한 평탄지
원통산
보통 산성터는 명당일 가능성이 높다.
서벽 아래
서벽 돌들로 두 기의 탑을 만들어 놓았다.
서벽의 석축
다시 남벽구간
남벽 구간의 석축
남벽 구간의 회곽도
답사를 끝내고 하산한다.
원통산. 원통골로 들어간다.
원통산, 원통골, 원통저수지.
원통저수지 아래 앞재 가는 길
원통저수지
원통산
최시형이 은거한 원통골
원통골 전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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