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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루트기행/가야 루트

대가야 동서루트를 따라서(2) : 월광사~성기리산성~큰재~우두산~가소성

<2010년 5월 23일>

 

대가야 동서루트의 출발지는 낙동강 서안에 있던 대가야의 내륙 포구인 지금의 경북 고령군 개진면 개포이다. 여기서 출발한 대가야 동서루트의 종착지는 서해 대 중국 연안 항로의 중간 기지인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이다. 격포에는 죽막동 유적이 있다. 죽막동 유적에서는 제사에 사용한 대형 토기류와 그 속에 담겨 있던 모형 돌칼, 철제품 등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물결무늬가 선명한 대형 토기와 제사에 사용한 대가야의 원통형 그릇받침이 눈길을 끈다. 이것들은 5C 후반에서 6C초에 이르는 대가야 계통의 토기들이다. 개포와 격포의 위도는 거의 비슷해 대가야 동서루트는 거의 일직선에 가깝다.

 

한때 가야의 폴리스 영역은 지금의 남한 정도였으나, 부여족의 남하와 흉노족과 선비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족들이 고구려를 통해 동해안 루트로 내려오면서 대체로 대가야 영역은 금강 이남과 낙동강 서안 유역까지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야 동서루트의 정점은 5세기 후반대로 사료된다. 즉 6세기 초에 편찬된 대륙 사서 <남제서>에 따르면, 479년 가라국왕(대가야의 하지왕으로 추정)이 사신을 보내자 제나라에서 가라국왕에게 '보국장군본국왕'의 작호를 준 것으로 씌여 있다. 일각에서는 5세기 후반대에 이르러 전북 고창, 부안 일대가 백제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대가야는 섬진강루트를 통해 격포항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는 가야와 백제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낭설에 불과하다. 만약 백제와 가야가 비우호적인 관계라면 섬진강루트를 이용한다고 치더라도 가야의 배들이 격포항에 출입하는 것이 용납될 리 없다. 따라서 5C 후반대 백제가 지금의 전라북도 서해안 일대를 완전히 석권하였는지는 둘째치고라도 백제와 가야 상호간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가야는 육로든 해로든 격포항을 이용하는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이 시기 대가야 동서루트는 그 활용도에 있어 정점에 달하였을 것이다.

 

언제부터 대가야 동서루트가 그 기능을 상실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554년 남부여과 가야의 연합군이 관산성 전쟁에서 신라에게 패퇴한 이후 562년 고령 지역의 대가야가 패망함으로써 대가야 동서루트는 신라와 남부여간의 동서루트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와 남부여간에는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교루보다는 전쟁루트로 의미가 있다.

 

어제가 아버지 생신일이라 진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늘 오후 진주에서 대전으로 돌아오면서 대가야 동서루트의 중간 구간인 합천 야로면 월광리 월광사지에서 출발하여 일본 천황가의 원향인 '고천원'으로 비정되는 가조면 일대를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연휴 3일째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운치는 제법 있었다.

 

월광사지는 88올림픽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에서 나와 해인사 방향의 1084번 지방도를 타고 3분여 가다보면 월광사지 안내판이 나온다.

 

월광사는 대가야 도설지왕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전설이 맞다면 대가야의 최고권력자가 스님이 된 것이다. 5C 후반대 가야와 백제는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6C 접어들면서 백제의 대가야 정복 전쟁이 벌어지자, 가야는 522년에 이르러 신라와 결혼동맹을 추진한다. 대가야 이뇌왕과 신라의 왕녀인 이찬 비조부의 누이가 결혼한 것이다. 즉 가야는 신라를 통해 백제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영악한 신라는 이를 기화로 대가야를 복속국으로 삼으려고 들었다. 결국 결혼동맹은 7년만에 깨지고 이찬 비조부의 누이는 신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마도 이때 태어난 아이가 월광태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신라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고 대가야 유민들을 달랠 목적으로 신라의 꼭두각시왕으로 월광태자 즉 도설지왕을 내세운 것이다. 월광태자는 신라 어머니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신라 입장에서도 믿을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신라의 대가야  복속정책이 어느 정도 완료되자, 신라는 대가야를 없애고 신라의 군현으로 편재하였을 것이다. 고독한 왕자이며, 무기력한 왕이었던 월광태자는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말년에 월광사를 짓고 반도에서 가야의 마지막 역사를 마무리한 듯하다.

 

 월광사 전경

 

가야천이 힘차게 월광사 옆을 흐르고 있다.

 

 월광사 앞에서 가야산 해인사를 거쳐 내려 온 가야천과 매화산,우두산,비계산에서 발원한 이천이 합류한다. 멀리 보이는 교각은 88올림픽고속도로이다.

 

 월광사 동쪽의 70년대 건물. 목욕탕 건물이었던가? 아니면 담배 건조장? 굴뚝이 높이 솟아 있다.

 

 월광사 삼층석탑 (동탑)

 

월광사 삼층석탑 (서탑)

 

월광사 삼층석탑 (서탑) 

 

 안내판

 

'아득한 풍경소리 어느 시절 무너지고   태자가 놀던 달빛 쌍탑위에 물이 들어   모듬내 맑은 물줄기 새아침을 열었네.'

월광태자의 심경을 시로 잘 표현한 듯하다.

 

월광사 정원

 

 월광사 대웅전

 

 대웅전에서 월광태자를 불러 본다. '어디 계세요? 태자님!'

 

 현재 월광사는 찾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한 곳이지만, 대가야 전성시절에는 이 앞이 주요 도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 마지막왕이었던 도설지왕이 거처하였기에 당시 많은 사람들이 월광사로 몰렸을 것이다. 도설지왕의 입장에서는 신라 조정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불교에 귀의하는 것이 필요했으리라. 기실 조선에서는 왕족간에 특히 형제지간에 서로 피를 부르는 일이 잦았는데, 고려에서는 거의 없다. 이는 왕이 못된 왕자들은 국사나 왕사가 됨으로써 권력에 뜻이 없음을 표현하였기에 왕자간에 화를 부르는 일이 적었던 까닭이다. 결국 불교를 무시한 조선 왕조는 형제간에 골육지쟁의 업보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이에 견주어 보면, 월광태자의 처신은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서탑 옆의 소나무. 보라색으로 물들었네.

 

 

 월광사 전경

 

 

 

 월광사 쌍탑

 

 가까운 것이 서탑, 먼 것이 동탑.

 

 소나무 뒤에 숨으려는 동탑.

 

 서탑

 

 가야천은 흐르고

 

 월광사 서쪽으로 난 길이 대가야 동서루트이다. 이천을 거슬러 오르는 길로 오도지맥의 큰재까지 단숨에 갈 수 있다. 88올림픽고속도로도 오도지맥의 큰재까지 대가야 동서루트와 평행하게 달린다.

 

 이천교 지나 바라본 이천리 마을. 이천이 흐르면서 협곡을 만들어 놓았다.

 

 평행하게 88도로가 달리고 있다. 88올림픽고속도로 설계자들이 대가야 동서루트를 알리 없지만, 결국 이 길이 동서의 최단 루트임은 현대의 고속도로 건설 기술자들도 인정한 셈이다.

 

창마마을에서 1084번 지방도에 합류하고 성기2구 마을 이정표까지 왔다. 우리나라에는 동네 이름이 성기 마을인 곳이 제법 있다. 대부분 옛날 산성이 있었던 마을이다. '기'는 한자로 '터 기'인데, 우리말로 바꾸면 '성터' 마을인 셈이다.

 

성기2구 마을 이정표에서 바라본 성기1구 마을과 안개로 흐릿한 비계산(1130.0m) 원경

 

 비계산 아래 산성터.

 

 

 

 비계산

 

 산성의 모습.

 

 

 

 타원형의 토축 모습. 예술이다.

 

 비계산 아래 예쁘장한 산성의 모습.

 

 한컷 더.

 

비가 와서 산성 답사는 다음 기회에.

 

 성기1구 마을 안내비. 성기1구 마을은 산성 내에 존재한다. 산성의 존재는 이곳이 대가야 동서루트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고대 육로는 산성과 산성간의 연결이다.

 

 성기1구 마을 뒷편 1084번 지방도 변에 서있는 비계산 등산로 안내판

 

 골프장 정문 가기 전의 나부동 마을 가는 길. 대가야 동서루트는 나부동 마을을 거쳐 오도지맥의 중요 고개인 큰재를 넘어 지금의 거창군 가조면 일대에 진입한다.

 

 골프장 게스트하우스 가는 길에서 찍은 오도지맥의 큰재.

 

오도지맥의 큰재를 지나면 일본 천황가의 원향인 '고천원'으로 비정되는 거창군 가조면 일대가 나온다. '고천원'으로 비정하는 까닭은 가야산의 서쪽 울타리인 '우두산'의 존재 때문이다. '우두산'은 소머리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다른 말로 '소시모리'라고도 한다.

 

 가조면 고견사 가는 길에서 바라 본 우두산(1046.2m).

 

 비온 뒤라 그런지 안개와 구름이 구분되지 않고 한 줄기 빛이 내려 우두산이 신비롭다.

 

 안개 속에 다시 잠기는 우두산. 소시모리. 일본 천황가의 원향.

 

 

 고견천. 고천원 시절 이곳에는 아름다운 동산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고견천은 가조들(고대에는 고천원)을 적시는 가천으로 합류한다. 가천은 남쪽으로 긴 협곡을 이루며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으로 들어간다. 거창군 가조면과 가북면은 1,000m에 가까운 큰산들로 둘러쌓인 분지로 방어와 생산에서 자립적인 가야 폴리스를 형성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를 지닌 지역이다. 일본 천황가의 원향으로 가조들은 고천원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천황족이 가야의 일파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견천 남쪽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병산마을 앞의 장군봉 등산로 안내판

 

 

 

 

 금귀산 자락과 송림

 

 

 

 

 

 가조분지의 북방인 가북면의 용산리 용산 마을 뒷산. 이 산 언저리에도 산성이 있다.

 

 

~ 대가야 동서루트를 따라서(3)으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