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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루트기행/가야 루트

대가야 동서루트를 따라서 (3-1) : 가소성~살피재~개봉고분~거열산성

<2010년 6월 12일 ~ 2010년 6월 13일>

 

오늘은 필자의 동선과 글의 순서는 역순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소성은 파사이사금 8년(87년) 가을 7월에 마두성과 함께 축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소성과 마두성의 축조 배경은 서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으로는 가야와 접한 사실에 있다고 <삼국사기>는 왕명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진실이고 가소성이 지금의 거창군 가조면 일대의 성이라면, 서라벌(신라의 전신)은 이미 1C 후반대에 낙동강을 너머 백두대간 근접지역까지 진출한 것이 된다. 이는 진흥왕 23년(562년) 이사부 장군의 대가야 정벌 기사와는 모순된 사실이다. 물론 달리 해석하면 서라벌이 후대 어느 시점에서 가야 세력에게 이곳을 점령당하고 진흥왕 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니면 파사이사금 대에 축조한 가소성이 지금의 거창군 가조면 일원에 있었던 성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늘도깨비는 해석을 조금 달리 하고 싶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읽다 보면, 박석김 3왕조의 출신지가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특히 초기 박씨의 세계는 완전 미스테리다. 그 중에서 파사이사금의 출신지는 박혁거세의 가계와도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와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경계인 파사산 산정에서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산성이 하나 있다. 바로 파사성이다. 예로부터 파사이사금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에는 '파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파사'는 불교와 관련된 이름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당시 서라벌국의 크기는 형상강 일대로 국한되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조>에 의하면 당시의 영토는 북쪽으로 고타군(경북 안동시 일대로 추정), 남신현(한나라 대방군에 속하였다가, 뒤에 고구려 소명현으로 고쳤다)까지 동쪽으로는 가소성(경남 거창군 가조면 일대로 추정) 너머 고소부리군(지금의 전북 정읍시 고부면 일대인 고사부리성으로 추정)까지 남쪽으로는 가야와 전투가 잦았던 마두성 일대까지 그리고 있다. 물론 남신현을 한나라 대방군의 속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고타군을 거타군으로 해석하여 지금의 안동이 아니라 거창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파사이사금의 족적은 당시 서라벌의 영역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이는 파사이사금의 종착지가 지금의 형상강 유역인 서라벌일 수는 있어도 출신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는 백두대간을 북에서 남으로 넘어 온 외지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가야와 서라벌 세계에 불쑥 나타난 침입자이거나 정복자이다.

 

일본 천황가의 가야 폴리스로 추정되던 가조 분지 일대도 이 외부 침입자에 의해 천황가의 선조들은 남행을 서둘렀을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신비에 휩싸여 있는 가소성을 찾아가 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가소성은 금귀산성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금귀산은 해발 710m에 이르는 높은 산으로 가조 분지의 치소로 적합하지 않다. 가북면 용산리 산성이나 황사산성도 가조분지의 북방에 치우쳐 있어 치소로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하늘도깨비는 가조분지 일대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가까운데서 가소성으로 추정되는 구릉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88올림픽고속도로 가조나들목이 위치한 구릉이다. 가조나들목은 다른 가조분지의 들판에 비해 지상 2~3층 정도 높다. 답사할 시간은 없었지만, 자연적인 산 구릉이 아니라 인공적인 축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조나들목 부근의 구릉에 위치한 논, 후대에 현의 치소는 없어지고 주민들이 전답으로 개간하였을 것이다.

 

 나들목 들어가고 나가는 입구, 나들목 입구에서 보면 조그마한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다.

 

 가조 나들목 구릉은 제벏 넓은 들판이다. 만약 이곳이 가소성이라면 그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쪽으로 바라 본 모습 

 

 가조 나들목

 

 우두산(북방)

 

남쪽으로 바라 본 모습, 남쪽으로 내려가면 가천을 따라 협곡이 나오고 협곡의 끝에서 낙동강 지류인 황강에 합류한다.

 

 

가조나들목 나와서 구릉을 바라 보면 인공적인 성곽임을 알 수 있다.

 

 

 

건물 뒤로 성벽이 보인다.

 

 살피재 넘기 전 독립만세 기념탑 부근에서 바라 본 가조분지. 일본천황가의 고천원으로 비정되는 곳.

 

 우두산

 

 우측 제일봉이 오도산(1120m)이다. 정상에는 중계소가 있다.

 

 좌측은 비계산(1130m) 자락이다.

 

 장군봉과 우두산

 

 비계산 자락

 

 동쪽으로 바라 본 모습

 

 

 

우측이 비계산 자락

 

 살피재 오르기 직전에 바라 본 가조분지

 

가조분지의 남벽을 이루는 오도산 및 오도산 줄기가 보인다.

 

 

 

  살피재. 살피재는 가조분지와 거창분지를 잇는 유일한 300m대 고개이다. 보이는 모습은 거창읍에서 가조면으로 가는 방향이다.

 

 살피재에서 내려오면 둔마리 벽화고분 가는 길이 나온다. 필자는 거창에서 가조가는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좌회전했다. 차들이 올라가는 방향이 가조로 가는 살피재 넘는 1084번 지방도이다.

 

둔마리 신촌마을 뒤로 금귀산이 보인다. 금귀산에는 가소성으로 알려진 산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금귀산성을 가소성으로 보기에는 부적절한 것 같다. 가소성은 평지성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둔마리 벽화고분 안내판. 고분은 둔마리 대촌마을로 가야 한다.

 

둔마리 대촌마을. 이정표를 따라 걷다가 시간때문에 다시 차로 갔다.

 

 마을 길

 

 시골 담벽

 

금귀산

 

 금귀산 전경

 

 

 

 둔마리 벽화고분 주차장

 

멀리 고분이 보인다

 

고분 가는 길

 

 둔마리 고분 전경

 

 

 

둔마리 벽화고분 안내판. 금귀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다. 하나의 무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좁은 산등성이는 양쪽으로 급한 경사를 이룬 계곡으로 풍수적으로 좋은 자리라 한다.

 

 

 

 

 

 호석을 볼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의 얼굴이 우주인을 닮았다는 것이다. 화성인가 수성인가 목성인지는 모르겠다. 암튼...

 

 목이 사라진 호석

 

벽화고분 뒤에서 바라본 전경. 왜 명당인지는 알겠다.

 

 살피재 올라가는 계곡 방향

 

 좌측 제일봉이 박유산(712m). 살피재는 금귀봉과 박유산 사이 계곡으로 올라간다. 이곳은 현재 1084번 지방도 뿐 아니라 88올림픽고속도로도 지나간다. 대가야 동서루트라 할만하지 않은가?

 

벽화고분 원경

 

 아래 무덤도 고려시대로 보인다. 양 계곡이 경사지고 산등성이는 무덤 하나 들어갈 정도로 좁다.

 

난장이 호석

 

 키다리 호석. 두 호석의 키가 차이난다.

 

 

 돌아오면서 벽화고분 가는 길을 찍어 본다.

 

 

 주차장에서 바라 본 금귀산

 

고개마루에서 바라본 금귀산

 

감자꽃

 

 꽃이름 모르겟다. 하늘도깨비 제일 약한 구석이 꽃이름 식물이름 등이다. 언제 식물도감이라도 구해야 되나.

 

 둔마리 대촌마을 보호수

 

1084번 지방도로 나와 거창방향으로 가다 보면 88올림픽고속도로를 볼 수 있다.

 

 1084번 지방도에서 바라본 금귀산

 

 거상농산 앞에서 거창가는 두갈래 길이 나온다. 우측으로 가면 1084번 지방도로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가면 88도로 가는 길이다. 두 길다 고대 동서루트이나, 1084번 지방도 길이 거열군(혹은 거타군) 치소 가는 길이다.

 

거상농산 앞에서 바라 본 88도로

 

 좌측 계곡 따라 내려가는 길

 

 1084번 지방도 가다가 황강 건너기 직전에 거창읍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안내판. 불상 주위에 주춧돌과 기와조각들이 확인되고 잇어 노혜사 또는 금양사가 있었다는 전승을 뒷받침하고 잇다. 불상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 사찰등의 존재는 이길이 옛부터 주요 간선도로임을 의미한다. 

 

 

 석조여래입상을 지키고 잇는 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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