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9일>
<일본서기> 천지천황 원년(662년) 12월과 2년(663년) 2월의 기사는 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원년 12월 백제왕 풍장과 좌평 복신 등이 협정련과 박시전래진과 의논하면서 주유는 방어하고 싸울 장소이지만 전답에서 멀고 토지가 척박하고 농잠할 땅도 아니라서 백성들에게 기근이 닥칠 수 있으므로 피성으로 옮기자고 하였다. 피성은 서북으로 고련단경의 물을 띠고 있고 동남에는 심니거언 같은 제방이 있어 방어하기에 좋으며, 사방이 논이고 도랑도 파여 있어 꽃피고 열매 여는 것이 삼한 중의 가장 기름진 곳이므로 비록 땅이 낮은 곳에 있더라도 옮기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박시전래진이 혼자 피성은 적이 하루밤에 올 정도로 적과 너무 가까워 위태롭다며 피성 천도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박시전래진의 간언을 듣지 않고 결국 피성으로 천도하고 말았다. 2년 2월 신라군이 백제 남반(남쪽 경계) 4군을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덕안의 오기) 등의 요지를 빼앗았다. 이에 피성은 적에게 너무 가까워 거주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박시전래진이 말한대로 주유로 다시 돌아왔다."
과연 김제 벽골제가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심니거언인가를 보기 위해 성산산성과 서암동토성을 보고, 29번 국도를 타고 김제시 남쪽인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 벽골제로 달려갔다. 김제시 남쪽을 흐르는 원평천을 건너면 바로 벽골제 정문이 나온다.
벽골제 정문을 들어서면 벽골탑이 보인다.
멀리 수리민속유물전시관이 보인다. 보통 박물관이 6시에 마치는데, 20여분 남아 있어 급히 서둘러 들어갔다. 가뿐 숨을 몰아쉬고 볼수 있느냐고 물으니, 박물관 지기는 천천히 둘러 보라고 말한다.
논 갈때 쓰는 도구
동장군. 모양도 가지각색이군.
물대기할 때 쓰는 '미니 수차'로 무자위로 부른다.
살포. 6세기로 추정되는 김해 구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살포의 복제품이다. 살포는 도랑을 내거나 작은 물꼬를 트고 막을 수 잇는 연장으로 주로 지주나 감독자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농경사회에서는 권위의 상징이 되어 있다. 살포는 주로 충청도 이남의 수장층 유물에서 출토된다. 살포는 삼한 수장층의 상징으로 가야 사회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전시관 내 '미니 물레방아'
조상단지. 하늘도깨비 그림자 비치네!
상량쌀
잔밥먹이기 풍속
일월 신앙에 대한 기록. 모두 농경과 밀접하다.
벽골제와 관련있는 지명들을 찍어 보았다. 벽골제 축조 과정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과연 벽골제는 삼한의 제일 큰 기념물로 위대한 역사(집단 노동)의 결과물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심니거언'은 '벽골제' 말고 달리 무엇을 지칭하겠는가?
신털미산 유래. 벽골제 수축에 동원된 일꾼들이 버린 짚신(초혜)들이 산을 이루었다고 초혜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짚신에 붙은 흙을 털었다고 하여 신털미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되배미에는 집단 노동의 비인간성을 내포하고 있다.
제주방죽의 유래
단야 낭자가 거문고를 뜯었던 산이라서 명금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명금산에는 산성이 있다.
단야 낭자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빛나는 벽골제에 얽힌 전설. 벽골제 축조의 위대한 역사속에는 집단 노동의 비정함과 단야 낭자의 거문고 소리와 희생 등이 감추어져 있다. 지금도 동진, 만경강 유역인 정읍, 김제, 부안 지역은 70년대 유역 변경식 섬진강 댐 축조 사업, 계화도 간척사업, 2000년대 새만금방조제축조사업 등 물과 땅에 대한 위대한 전쟁을 또다시 벌리고 있다. 아, 이것이 동진강과 만경강 유역 주민들의 바꿀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전시관을 나오면 좌측에 단야각이 있다. 단야각은 단야 낭자를 모신 사당이다.
단야 낭자의 전설 안내판.
월촌 입석을 눈앞에 두고 놓쳤다. 너무 현대적이라서...
월촌입석 뒤로 가면 벽골제 5대 수문 중의 하나였던 장생거가 나온다.
장생거 안내판
일제 때 발행된 벽골제 사진 엽서. 군산 동국사 주지 종걸스님께서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장생거 옆에 있는 벽골제 모형도 안내판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하였다고 함.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벽골제 축조기사가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아닌 <신라본기>에 실려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이사금 21년조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비로소 벽골지를 개척하니 그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이를 학계에서는 오기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늘도깨비는 흘해이사금 집단이 이곳 동진만경강 유역에서 활동하다가 후대에 경주 형산강 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흘해이사금 집단의 이동 경로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가설이다. 여러모로 신라의 지배집단은 많은 혼혈 과정이 있었고 따라서 이를 오기라고 단정적으로 보는 것 보다는 유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보는 것이 필요하다. 과연 신라본기에 실려있는 기사를 백제의 업적으로만 볼 수 있겠는가?
벽골제 관련 지명
원평천은 풍수에서 호남의 계룡산(암계룡산-물론 수계룡산은 대전의 계룡산이다)으로 유명한 모악산(793.5m)의 물줄기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강이다. 벽골제는 만경강과 동진강의 사이에 있으면서 하류에서 동진강으로 유입되는 원평천을 막아 거대한 저수지로 축조한 것이다. 이러한 벽골제는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의 평야를 촉촉히 적셔주는 근원으로서 반도 최고의 식량 보고를 유지시켜주는 어머니 같은 호수라고 할 수 있다.
벽골제에는 5개의 수문이 있어 김제, 부안, 정읍의 평야에 물을 공급한다. 기록과 전설로 유추컨대 남부여 시절에도 제방의 높이만 다를 뿐 무근촌현(지금의 김제시 성덕면 일대), 개화현(지금의 김제시 부량면 일대로 남부여 대에는 개화현, 신라와 고려대에는 부령현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빈굴현(지금의 정읍시 신태인읍 일대로 신라대에는 빈성현, 고려대에는 인의현으로 불렷음) 등 3개현에 물을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남부여대 벽골제는 남북(북쪽의 신털미산에서 남쪽의 명금산)으로 축조한 1,800보 길이의 제방이다. 1보가 6척(1척은 1자로 대략 30cm)이므로 벽골제의 길이를 M로 환산하면, 3.24Km가 나온다. 지금 대략 측정해보면, 3.5Km이므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후대에는 제방의 두께와 높이만을 수축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 벽골제의 저수지는 사라지고 논으로 개발되었으며, 감곡천이 있어 저수지를 대신하고 있다. 섬진강 상류호인 옥정호의 물을 정읍시 칠보면에서 유역 변경하여 동진강으로 흘려 보낸 것을 이곳 감곡천을 이용하여 이 일대 논에다 물을 공급하는 것이다.
안내판에는 만경현(남부여대에는 두내산현)이라 표시하였지만, 부윤현(남부여대 무근촌현, 지금의 김제시 성덕면 일대)이 조선시대에 만경현으로 편입되어서 만경이라 쓴 것 같다. 지금의 만경읍까지 벽골제의 물을 흘려 보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미 만경읍 남쪽에 신평천이 있어 벽골제(원평천)의 물까지 보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만경읍에는 능제가 벽골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신털기산의 남북에 있던 수여거와 장생거는 만경현으로 물을 공급하였다. 장생거 아래에 되배미 지명이 나온다.
중심거는 부령현(남부여대에는 개화현, 지금은 김제시 부량면이지만 과거에는 부안군에 포함)과 정읍 고부까지 물을 공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부까지 공급하기는 설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고부는 동진강 이남으로 벽골제의 물까지 공급하기도 어려우며, 고부천이 있어 공급할 이유도 없다.
경장거와 유통거는 남부여대 빈굴현(지금의 정읍시 신태인읍 일대)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명금산과 제주방죽의 지명이 보인다. 명금산은 단야 낭자가 노역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가야금을 뜯은 곳이라 한다.
옥정호(섬진강 상류호)~칠보면 수로~동진강~감곡천~원평천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물의 여행의 종착점이다. 보이는 수문은 감곡천에서 원평천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곳이다. 감곡천 수로가 벽골제를 대신함으로써 저수지는 논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지혜는 끝이 없다.
감곡천. 남쪽으로 명금산이 아스라히 보인다. 남북으로 길게 보이는 제방이 과거 벽골제이다.
감곡천 수로
장생거 후면 모습
장생거 수로의 모습
장생거 후면
감곡천 수로
감곡천 수로에서 원평천으로 물 공급을 조절하는 수문. 물소리가 꼭 용이 용틀임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물론 용틀임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용틀임하는 소리는 감곡천 수문에서 물 흘려 보내는 소리와 같을 것이다.
감곡천 수로
포교 방수문
벽골제 제방의 모습. 남북으로 장장 3.5Km라고 한다. 고대 남부여 시절의 거대한 역사가 그려진다.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심니거언'은 벽골제를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
김제 벽골제비
안내판
장생거 모형으로 수문 체험장이다.
유물전시관에서 보았던 무자위. 낮은 곳에서 높은 전답에 물을 퍼 올리는 수차이다. 이칭으로 무자새 혹은 수룡이라고도 한다.
물레방아
용두레
용두레
무자위, 용두레 모두 물대는 도구이다. 고대 노동의 가장 고된 과정은 역시 물대기로 보인다. 아! 물을 저장하고 물을 대는 건 생존을 건 투쟁이다.
벽골제 야외 공원에는 쌍룡이 있다. '니 놈들이 단야 공주를 냠냠했던 고약한 용추인가?' '아닌데요. 우린 그냥 조형물인디요!' 하늘도깨비 또 헛것이 보인 모양이네. 돈키호테 처럼 풍차를 괴물로 착각한 것이 분명하다.
'요것들 냄새나는데 발뺌하네.' '증거주의잖아요. 물증을 잡으세요! 깨비어르신!' '헐~그래 이따보자.'
명금산이 보이고. 남에서 북으로 물이 힘차게 흐른다.
현재는 요런 수문들이 장생거 등을 대신하여 부량면 일대 들판을 적셔주고 있다. 물 빠져나가는 소리 한번 요란하다. 요런데서는 물에 빠지면 X된다. 조심!
위 사진에서 빠진 물은 요렇게 흘러간다. 현대판 장생거 아닌가?
북쪽의 감곡천 수로
태양이 빛을 잃어 음산한 기운이 내려온다. 좌룡의 대가리 위에 보이는 것이 태양이다. '니놈들이 용추맞지! 잠깐 갔다오니 이렇게 하늘을 희롱하고 있구나! 감히 하늘도깨비 눈을 속여! 거짓말한 죄까지 물을테다!'
'두발들고 다음에 하늘도깨비 올때까지 가만히 서있어!' '아! 예!' ㅋㅋㅋ
저녁이 다 되어 김제 부량면 소재지에 있는 짬봉집 '고각'으로 갔다.
전복생합짬봉
고각. 유명한 분이 썼다고 했는데. 주인장이 손으로 '고각'을 가리키고 있다. '고'는 '계명주 고'임. 전날 술을 담가 다음날 새벽에 닭이 울때 먹을 수 있도록 빚은 술을 '계명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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