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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피성을 찾아서

피성의 동부 방어성(1) : 김제 금구산성, 신응리토성

<2010년 5월 15일>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따르면, 남부여의 완산에는 속현이 셋인바, 두이현(혹 왕무현), 구지지산현(혹 구지산현), 난등량현(難等良縣)이 있었다. 두이현과 구지산현은 비록 신라의 삼한통일 이후 완산주의 속현이 되었으나, 남부여 부흥 전쟁 당시에는 피성의 동부 방어성들로 기능하였다. 두이현은 지금의 완주군 이서면과 전주천 서쪽의 서전주 일대로 추정되며, 구지산현은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봉남면 일대로 사료된다.

 

오늘은 남부여 구지산현 일대에 산재해 있는 피성의 방어성들을 둘러 보기로 작정하였다. 5월의 산성 답사에 앞서 기대반 우려반으로 출발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우거져 야산의 산성들은 쉽사리 답사길을 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호남고속도로 남전주 나들목을 나오자 마자 우회전하면 바로 금구면 소재지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남부여의 구지산현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금구초등학교 옆에 주차하고는 캔커피로 목을 달랜다.

 

 금구초등학교 정문에 서 있는 수령 470년의 느티나무

 

안내판은 개구쟁이들의 손에 다 지워지고...

 

 저 산이 봉두산일 듯...

 

금구산성은 월전리산성, 봉두산성, 봉성 등으로 불린다.

금구면 소재지에 2km쯤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월전리와 선암리를 경계한 산이 있는데, 봉두산(鳳頭山) 또는 봉산(鳳山)이라 부른다. 이곳 산정(山頂)에 지금까지도 그 자취가 완영하게 남아 있는 석축성(石築城)이 있는데, 이 성은 금구골을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라 부르던 백제시대에 쌓은 성이라 전하여진다. 봉두산에 있는 성이라 약해서 봉성(鳳城)이라 부르며 금구 별칭으로도 봉성(鳳城)이라 한다. 그곳에 군량창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산의 동쪽부분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부분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한 석축이 100여 미터 이상 남아 있으며 이 같은 석축의 흔적은 200여 미터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화강암으로 잘 쌓아 올린 성이다. 산의 서,북,남쪽은 자연경사면을 이용하였으며, 이러한 자연 성벽을 포함하면 전체 길이는 900여 미터에 이른다.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아직도 키보다 높은 성벽이 남아 있는 곳도 있으나, 산성 옛터의 무너져 내린 바윗골 사이에는 시누대(산죽)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쓸쓸함을 더 한층 느끼게 한다.

산성의 축성년대를 명확히 밝혀주는 문헌자료는 없다. 가장 오랜 것으로는 동국여지승람이 있는데 여기에는 '봉두산 재현동 2리 진산 이산유비봉지형 고명 재유양시산 전유난산…(鳳頭山 在縣東 二里 鎭山 以山有飛鳳之形, 故名 在有楊翅山 前有卵山…)'이라 하였고, 산성의 존재는 언급이 없다. 산성이 기록된 것은 금구읍지와 김정호의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이 있는데 읍지에는 백제시대에 쌓았다고 실려있고,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에는 산성봉으로 표기되어 있어 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주변에 산재한 유물을 중심으로 연대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통일신라시대의 토기편, 고려시대의 자기편, 조선시대의 와편 등이 뒤섞여 있다. 지표에서 수습되는 유물에 의하여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자세한 검토가 요구된다고 본다.

금구산성 서북방에는 해발 130m의 봉우리에 테머리식으로 두른 토성도 있다. 이를 금구토성이라 한다. 이곳은 금구면 월전리 봉산마을 뒷산인데, 남부여 구지산현의 치소로 추정된다. 평화시에는 금구토성이 현의 치소이지만, 전쟁시에는 금구산성이 구지산현의 장기 농성으로 적당하다. 금구토성은 남부여가 들어오기 전, 이 일대 가야 폴리스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이를 남부여가 구지산현의 치소로 삼았다가 신라와의 전쟁시 필요에 의해 금구산성을 축조한 듯하다. 그 만큼 석성보다는 토성의 연원이 깊다.

구지산현에서 북으로 7리 밖에 낙양현(樂陽縣)의 치소로 추정되는 성터도 있다. 낙양현성의 폐합연혁 및 연대는 미상이다. 어쩌면 이곳이 금구토성보다 연원이 오래된 가야 폴리스의 중심지일 수도 있겠다. 낙양현성은 금구면 낙성리 일대에 있다고 한다.

 금구면 소재지 뒷편 선암저수지 가는 길로 가다가 바라 본 봉두산((279.1m). 산정에 금구산성(봉두산성)이 있다.

 

 선암저수지. 오른쪽 제일 높은 산이 구성산(487.6m)이다. 호수에 내시(괴물)라도 나올듯 오묘한 기운이 뻐치는 듯하다.

 

 허, 산그림자일세!!

 

봉두산

 

 선암저수지 호반

 

 저수지 뒤편 박바위 마을에서 상목냉굴 가는 길로 좌회전해서 마을을 벗어나면 동편쪽으로 모악지맥이 보인다. 모악지맥은 호남정맥에서 분기하여 만경강과 동진강의 경계를 이루며 김제시 광활면 심포리 봉화산에서 맥을 다한다. 허나 만경평야와 동진평야가 펼쳐져 있어 그 지맥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아마, 모악지맥 답사자는 없을 듯하다.

 

 

 

 상목 냉굴 가시는 분은 오른쪽 비포장도로로, 산성가시는 분은 왼쪽 아스팔트로.

 

 상목냉굴 이정표 앞에서 당월저수지 한 샷 찍으려는데, 비포장도로에서 승용차 한대 씽하니 달려와서 먼지를 일으키네. 저런, 고약한 사람 같으니... 예의도 없군.

 

당월저수지 제방 지나면 솔숲체험장 이정표가 바로 나온다. 여기에 주차시키고...

 

주차한 곳은 태인 시산경씨 병사공파 제각 앞이다. 지송! 우리나라에 경씨가 있구나! 유명한 사람은? 누구? 고려때 무신 경대승은 복경자를 쓰네! 아니면, 다음 부탁해요! 경(景)씨는 기자(箕子)를 따라 은나라에서 들어온 경여송(景汝松)이 평양에 세거하면서 시작했다. 그래서 그를 원조(遠祖)로 하고 있다. 그 뒤 경차(景磋)가 고려에서 지추밀원사 등을 지내고 태산군(泰山君)에 봉해져 그를  시조로 삼았다. 훗날 경상조(景祥祖), 경상록(景祥祿) 형제가 본관을 태인과 해주로 각각 나누어 대를 이었다. 그러나 최근 다시 태인으로 일원화하여 태인파, 해주파로 부른다. 태인(泰仁)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의 지명이며, 남부여 시절에는 대시산군, 신라에서는 대산군, 고려에서는 태산군으로 불렀다. 신라 말기 최치원도 대산군 태수를 지냈다고 한다.

 

 

태인경씨 제각 주차장 앞에서 바라 본 봉두산.

 

산책로를 따라 오르니 월전리 당월 마을 전경이 들어온다.

 

 산책로. 솔숲체험장이라 했는데... 소나무는 어디갔지. 이곳도 산불이 난듯하다.

 

 남부여 시절에는 지금의 금구면 소재지인 금구리 보다는 월전리 일대가 구지산현의 치소인 듯하다. 지세가 넉넉하고 편안하여 안정감이 느껴지는 터다.

 

 

 

숲풀이 우거져 더 이상 답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15분여 진입하다가 도저히 숲풀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빠져 나오니 온 몸이 온통 꽃가루 천지다. 아무래도 5월의 야산 산성 답사는 포기해야 할 듯하다. 다른 답사로를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금구천과 원평천이 합류하는 봉남면 신응리 토성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금구면 소재지에서 금구천을 따라 봉남면 소재지로 들어서서 봉남중학교 앞 남주교에서 금구천을 응시한다.

 

 금구천, 금구면 서도리 구성산과 선암리 봉두산에서 발원한 물이 금구천을 이루어 이곳 봉남면을 적시고 모악산(793.5m)에서 발원한 원평천에 합류한다. 원평천은 남부여 벽골군(지금의 김제시내)의 남쪽을 흘러 죽산면 대창리 명량토성 앞에서 동진강에 합류한다.

 

 금구천 남쪽

 

 금구면(남부여의 구지산현)과 금산면(남부여의 야서이현)의 경계를 이루는 구성산(487.6m)

 

남주교

 

 남부여의 구지산현이 있었던 금구면 방향. 가운데 볼록 솟은 산이 봉두산이다.

 

남주교에서 남쪽으로 봉남면 왕버들(천연기념물 296호)로 유명한 종덕리 종덕교를 지나면 신주(초처)마을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버스정류장 옆에 초처초등학교가 있다. 초처초등학교 건너편 언덕이 바로 신응리토성이다. 신응리 토성은 금구천과 원평천이 합강하는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

 

 신응리 토성 전경

 

버스정류장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좌편 봉곳 솟은 산이 구성산이고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줄기가 모악산 자락이다. 

 

신응리 토성 가는 길에 보이는 구성산

 

마을이 들어서 토성의 흔적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마을 고개를 넘어면 토성의 잔재가 보인다.

 

집이 있고 대문이 잠겨있다. 사유지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 토성인지 아닌지 확실히 볼 수는 없지만, 먼 윤곽으로 봐서 토성의 흔적으로 추정할 뿐이다. 사실 마을 전체가 토성이다. 어떠한 기능의 토성인지는 하늘도깨비의 연구 과제다. 어찌 보면 삼한 즉 삼가라 시절의 토성인지도 모른다. 남부여에서는 이미 기능이 상실한지도 모르겠다.

 

 보산 마을 길을 가로질러 마을회관 앞에서 구성산과 모악산 자락을 바라본다.

 

 건너편 칠성 마을도 토성일 가능성이 높다.

 

 마을길을 되돌아 나와 초처초등학교 뒷편 구릉을 바라본다. 이 일대 구릉 전체가 어쩌면 하나의 토성인지도 모른다.

 

 초처초등학교 전경. 이곳도 토성의 일부인 듯. 그런데 발음이 어렵다. 초치, 조처, 조져, 처치, 초쳐 등등... 차라리 영어로 교회를 뜻하는 처치라고 발음하는 것이 나을 듯...이 초등학교 졸업생들 어디가서 국민학교 어디나왔냐고 물었을 때 대답 한번 하기 힘들었겠다.

 

 아름다운 등교길.

 

 초등학교에서 바라 본 구성산과 토성 언덕

 

 신응리 토성 전경

 

 우리들의 어릴적 영웅, 반공소년 이승복. 감회가 새롭다. 70년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이 그립네. 그땐 이 동상도 매우 커다고 느꼈지. 뒤에 토성이 보인다.

 

 운동장 미끄럼틀 위에서 바라본 신응리 토성벽. 하늘도깨비 추정이다. 이 정도 규모면 한 현의 치소라도 적당할터...

 

 봉남면 종덕리 종덕교 부근에서 바라본 월성 언덕과 황산. 황산에는 황산성이 있어 피성의 동부 방어성의 핵심을 이룬다. 황산성의 좌우에 월성과 난산성이 있어 피성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운다. 자, 이제 황산성을 보러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