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산과 피성에 대한 고찰
1. <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249년) 3월의 기사는 벽지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탁순군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7국(비자발, 남가라, 훼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을 평정하였다. 이어 군대를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왕 초고와 왕자 귀수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이때 4읍(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이 자연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왕 부자 및 황전별(아라다와케), 목라근자 등이 함께 의류촌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 다들 예를 두텁게하여 보냈으나, 오직 천웅장언(치쿠마나카히코)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가서 벽지산에 올라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에 올라 같이 반석위에서 백제왕은 항상 서번을 칭하며 춘추에 조공할 것을 굳게 맹약하였다. 백제왕은 도하에 이르러 천웅장언에게 후하게 예우를 더하며 구저등을 딸려 보냈다."
그리고 <일본서기> 천지천황 원년(662년) 12월과 2년(663년) 2월의 기사는 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원년 12월 백제왕 풍장과 좌평 복신 등이 협정련과 박시전래진과 의논하면서 주유는 방어하고 싸울 장소이지만 전답에서 멀고 토지가 척박하고 농잠할 땅도 아니라서 백성들에게 기근이 닥칠 수 있으므로 피성으로 옮기자고 하였다. 피성은 서북으로 고련단경의 물을 띠고 있고 동남에는 심니거언 같은 제방이 있어 방어하기에 좋으며, 사방이 논이고 도랑도 파여 있어 꽃피고 열매 여는 것이 삼한 중의 가장 기름진 곳이므로 비록 땅이 낮은 곳에 있더라도 옮기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박시전래진이 혼자 피성은 적이 하루밤에 올 정도로 적과 너무 가까워 위태롭다며 피성 천도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박시전래진의 간언을 듣지 않고 결국 피성으로 천도하고 말았다. 2년 2월 신라군이 백제 남반(남쪽 경계) 4군을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덕안의 오기) 등의 요지를 빼앗았다. 이에 피성은 적에게 너무 가까워 거주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박시전래진이 말한대로 주유로 다시 돌아왔다."
2. 벽지산과 피성의 비정지 : 김제시 성산과 성산산성
일각에서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 기사에 나오는 벽지산을 지금의 김제시 성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 천지천황 원년과 2년조> 기사에 등장하는 피성 또한 지금의 김제시 성산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연 김제시 성산이 벽지산이며, 성산산성이 남부여 부흥군의 도성이었던 피성이란 말인가? 만약 피성이 김제시 성산산성이라면, 주류성은 지금의 부안 우금산성일 가능성은 거의 백퍼센트이다.
3. 김제 성산산성이 피성인 근거(1) : <일본서기> 천지천황 원년 12월조 기사에서 설명하는 피성의 입지
<일본서기>의 기사에 따르면, 피성은 서북으로 고련단경의 물을 띠고 있고 동남에는 심니거언 같은 제방이 있어 방어하기에 좋으며, 사방이 논이고 도랑도 파여 있어 꽃피고 열매 여는 것이 삼한 중의 가장 기름진 곳이나 땅이 낮은 것이 흠이라고 하였다. 고련단경의 물은 김제 성산산성의 서북을 가로지르는 지금의 신평천(김제의 북방인 백산저수지에서 발원)으로 비정할 수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단서는 동남의 '심니거언'이다. 고대부터 삼한의 3대 제방은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 김제의 벽골제라 하였다. 관개(수로)가 발달한 저지대는 김제의 벽골제 말고는 달리 추정할만한 입지를 찾기가 어렵다.
4. 김제 성산산성이 피성인 근거(2) : 산성의 규모
김제 성산산성은 교동 향교 서편의 작은 구릉 즉 성산을 타원형으로 두른 성책지이다. 성산은 현재 김제시 서부에 위치한 낮은 언덕이지만, 김제시 유일의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만큼 김제시 일대가 저지대여서 성산 만한 구릉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동쪽 즉 시내쪽은 성곽(城郭)이 보이지 않으나, 남서북은 지금도 성곽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성산의 성곽은 토성(士城)과 석성(石城)이 있었다고 하는데, 담장의 원형은 상실되고 성터만 남아 있다. 초축 년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성산은 남부여 시대의 것으로 사료된다. 이중성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의 원형이 사라지고 성터의 윤곽 그리고 성터에서 기와조각이 나오고 있을 뿐이다. 중앙은 약간 높으나 대략 평탄하고 토류를 높게 쌓았으나, 이는 고려대에 수축한 흔적으로 보인다. 실측에 의하면 주위 556.7m이며, 남북으로 가늘고 길다. 남부여 대 벽골군의 치소로 추정된다.
구 군지에 의하면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하여 성산을 비롯한 효동, 옥산, 요촌, 서암(현 행정구역) 등 행정구역 일부를 포함시켜 주위 장거리 3,820척, 성 높이 20여 척, 치첩(雉堞) 2,410이요, 옹성(翁城)이 넷이고, 못(池)은 없고 성안에 샘(泉)이 여섯 개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는데, 고종조(高宗朝)에 이르러 완전히 허물어져 증축하지 못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성산산성의 규모는 성산공원만을 보면 주위 556.7m이나, 실제 구릉으로 연결된 서암동 토성까지 고려하면 그 규모는 3~4배 이상 확장된다. 성산공원 북방 만경읍 방향의 29번 국도 동편의 대한지적공사 건물 뒷편의 해발 46m의 구릉을 테머리식으로 두른 서암동 토성도 성산산성과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서암동 토성까지 고려한 성산산성은 규모로만 보면, 적어도 남부여 벽골군의 치소나 남부여 부흥군의 도성인 피성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물론 성곽의 규모만으로 김제 성산산성을 피성으로 직접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남부여 부흥군의 도성으로서 규모면에서는 피성 추정의 충분조건은 만족시킨다고 볼 수 있다.
5. 김제 성산산성이 피성인 근거(3) : 피성을 중심으로 한 1, 2차 방어성의 존재
김제 성산산성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의 1, 2차 방어성들이 존재하는 바, 이 지역이 핵심지역이 아니라면, 적어도 대규모 전쟁이 아니라면 일정 거리를 두고 외곽 방어성들이 존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러한 외곽방어성의 존재이유는 백제 부흥전쟁 외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하늘도깨비의 답사기를 보면 알 수 있다.
6. 피성에서 주류성으로의 천도 이후
천지천황 2년(663년) 2월 신라군은 남부여의 남쪽 경계의 4군을 공략하여 그 중에 덕안 일대를 공취한다. 그 결과 피성의 배후 근거지인 주류성이 위태로워지자 남부여 부흥군은 피성을 버리고 다시 주류성으로 귀환하고 만다. 이후 피성 일대를 점거한 신라군은 오히려 피성을 주류성 공략의 교두보로 삼는다. 피성에 전방사령부 기지를 둔 신라군은 벽골제 둑을 통로로 활용해서 남부여 부흥군이 농성하고 있는 주류성 근처에 있는 고사비성(古沙比城)까지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 서서히 주류성의 숨통을 조여갔다. 남부여 부흥군이 그토록 중시했던 피성을 오히려 신라군들이 주류성 공략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피성은 칼의 검같은 곳으로 칼자루 같은 역할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남부여 부흥군의 칼자루 부분은 주류성이며, 칼검은 주류성의 동방 방어성인 피성과 고사비성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데, 칼검인 피성에 집착하다가 남부여의 남쪽 경계인 4군 지역까지 신라군에게 유린되자 서둘러 주류성으로 귀환한 것은 소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다. 남부여 부흥군의 피성 중시 정책은 결국 주류성 함락으로까지 귀결되었다. 남부여 부흥군의 마지막 희망이던 천지천황의 군선도 결국 백강 어귀에서 당나라 군선들에 의해 격파됨으로써 남부여군 저항의 불씨는 완전히 사그라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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