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0일>
산에 오르기엔 조금 더운 날이긴 해도 가을 하늘을 마음껏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가끔 가을 마무리에 바쁜 꽃뱀들이 나와 하늘도깨비를 놀래키기는 해도 말이다. 오늘은 백두대간을 오르기로 한다. 하늘도깨비가 대간 산행을 시작한 건 아니다. 대간에 산성이 있으니 오르는 거다.
남원 운봉고원은 백두대간을 경계로 지금의 남원 평야지대와 구분된다. 운봉고원 일대는 남강 상류이다. 운봉고원에 비가 내리면 남강으로 흘러 낙동강에 이른다. 반면 남원 평야지대의 물은 요천을 형성하고 섬진강에 다다른다.
고대에는 물처럼 이곳 운봉고원이 신라 땅이었다. 속함군은 지금의 함양으로 당시 운봉고원은 모산현으로 속함군의 속현이었다. 신라는 대가야를 복속시키고 이곳 운봉고원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섬진강 상류 장악을 시도하였다. 오늘은 모산현의 치소이자 전방사령부인 아막산성(달리 아영성 내지 모산성으로도 부른다)을 답사키로 마음먹었다.
표지사진 - 아막산성에서 바라본 운봉고원(아영분지 일대)
602년(남부여 무왕 3년, 신라 진평왕 24년) 모산성 전투 전개 상황
① 1라운드 : 아막산성 전투
무왕 대 이르러 나제간의 전선은 백두대간의 중부에서 남부까지 이동한다. 즉 전선이 이동하고 확대된 것이다. 이는 신라가 대가야를 점령하고 그 영역까지 복속시킨 결과이다. 이전까지 대가야는 남부대간에서는 나제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였다. 순망치한이라 했던가? 즉 남부여 입장에서 대가야는 입술이었다. 그러다가 관산성 전쟁 이후 대가야라는 입술이 없어지자 남부여라는 이는 매우 시리게 되었다. 무왕은 이러한 상황을 묵과하지 않았다. 그 첫 조치가 아막산성(모산성) 공격이었다.
“무왕 3년(602) 가을 8월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모산성(母山城)이라고도 한다]을 포위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항전하자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아막산성이 어디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김태식 교수는 아막산성을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산성으로 보고 있고, 곽장근 교수는 남원시 아영면 성리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자는 곽장근 교수의 입장을 지지한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를 보면 지금의 경남 함양군인 신라의 속함군에는 속현이 둘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모산현으로 아영성 내지 아막성으로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모산현이 비록 남부여에 의해 616년에서 663년까지 40년 이상 지배당하였으나 대가야 복속 이후 최초 신라 영역이었음 주장하는 기록이다. 모산현은 신라에서 처음 운봉현으로 개칭한 이래 운봉현은 고려시대까지 함양군의 속현이었다. 이처럼 고대에는 함양과 운봉고원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 오다가 조선에 이르러 운봉현이 남원부에 편입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함양의 상백리 고분군과 남원 아영분지의 월산리 고분군이 가야 계통으로 동일한 것은 직접적인 증거이다.
이는 운봉고원이 대가야 이후 사실상 신라의 영역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아막산성은 팔랑치 부근의 인월면 성산리 산성이라기보다는 환두대도가 출토된 월산리 고분군과 지척거리인 성리산성일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성리산성은 모산현의 치소로 기능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고 있고 남부여군의 공격 목표가 될 정도로 변경인 백두대간 상에 위치하고 있다.
아막산성(내지 모산성)으로 추정되는 성리산성은 모산현의 치소인 동시에 남부대간 방면 신라군 전방 사령부 역할을 겸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성리산성으로 신라의 병력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남부여 무왕과 신라의 진평왕은 아막산성에서 충돌하였다. 대가야 멸망 이후 대가야 영역을 두고 각각 동서로 진격하던 두 나라는 자연 국경인 백두대간 상의 아막산성에서 첫 전투를 벌인 것이다. 전투 결과 백두대간 상의 고지대에 위치한 신라군이 저지대에 위치한 남부여군 보다는 지형 상 전투에 유리한 것은 자명하였다. 1차 모산성 전투는 신라 진평왕의 승리로 돌아갔다.
② 2라운드 : 천산 전투
아막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은 아막산성 주변에 4개의 성을 구축하고 여차하면 섬진강 상류 옛 대가야 영역을 삼킬 기세였다. 비록 모산성 공략에는 실패하였지만 남부여 무왕은 이러한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무왕은 좌평 해수에게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주어 천산성을 비롯한 4성을 공략케 하였다.
“무왕 3년(602) 가을 8월에 신라가 소타(小陀),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 등 4성을 쌓고, 우리 변경에 침범하였다.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解讎)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4성을 공격케 하였다. 신라 장군 건품(乾品), 무은(武殷)이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싸웠다. 해수가 불리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泉山) 서쪽의 대택(大澤)으로 퇴각하여 복병을 숨겨 놓고 기다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좌평 해수가 보기병 4만을 이끌고 아막산성을 비롯한 백두대간 주변의 고지대 신라 산성들을 공략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해수는 불리한 싸움을 극복하기 위해 전투 장소를 바꾸었다. 그곳이 바로 천산의 서쪽 큰 못 주변이었다.
③ 3라운드 : 천산 서대택 전투
“무왕 3년(602) 가을 8월에 해수가 불리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泉山) 서쪽의 대택(大澤)으로 퇴각하여 복병을 숨겨 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를 타고 갑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대택까지 추격하여 왔을 때, 복병이 달려들어 갑자기 공격하였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군사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무은의 아들 귀산(貴山)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도망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느냐!’ 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箒項)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해수는 겨우 위기를 모면하여 단신으로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신라 장군 무은은 승세를 타고 갑병 1천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다가 남부여 좌평 해수가 친 올가미(복병)에 걸려들었다. 이후 귀산과 추항의 희생으로 여유를 찾은 신라군은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3차례에 걸친 제1차 모산성 전투는 비록 신라의 승리로 끝이 났으나, 남부여군의 의지를 꺾은 것은 아니었다. 남부여는 616년 다시 모산성을 공격하였고 결국 624년 속함성(경남 함양군)까지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지금은 비록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지만 역사적으로 이곳 운봉고원 일대는 7C 초반 무렵 나제간의 최대 화약고였던 것이다. 그때의 일들을 상상하며 답사하니 필자의 몸과 정신도 자못 흥분된다.
백두대간 짓재에 서 있는 복성리(성암마을) 이정표
짓재에서 장수군 번암면 논곡리 성암마을 가는 길. 성암마을은 복성리라고도 한다.
백두대간 짓재 (장수 번암면 방향)
백두대간 짓재 (남원 아영면 방향)
아영면 일대는 흥부의 고향이다. 짖제고개라고 표기하고 있다. 짓재 또는 잣고개는 산성이 있는 고개의 순 우리말이다. 지도에는 치재라고 표기되어 있다. 필자는 짓재라고 표기하는 것이 옿다고 본다. 백두대간상에는 복성이재라고도 부른다.
해발 550m의 복성이재
중치 방향 백두대간
짓재(복성이재) 전경
짓재
길을 잘못들어 묘지까지 오고 말았다. 중간에 백두대간 표지기 보고 빠져야 되는데...
묘에서 다시 밑에 길로 내려와서 고개길까지 오른다.
원래 이길로 내려와야 한다.
임도 고개에서 다시 백두대간 사치재 방향을 잡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민묘 부근에서 서남쪽으로 백두대간상의 고남산이 조망된다. 고남산에는 KT중계소가 있다.
민묘
고남산 아래가 바로 남원 평원인데, 남부여는 고남산 아래 수많은 성곽을 축조하여 방어하였다. 백두대간을 점유한 신라군이 항시 유리하였기에 남부여는 이곳에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을 투입하였다. 만약 남원 평원을 신라가 장악한다면 섬진강 상류지역인 임실군 관촌면까지 전선이 밀릴 것이다. 이 경우 섬진강 하류까지의 물길이 단절되어 남부여 입장에는 열도와의 교류가 원만치 못할 것이다.
다시 고개가 나온다. 최초에 이리로 올걸...
다시 백두대간을 오른다. 구절초가 피어 답사자를 반기는 듯하다.
성리 고개
백두대간 북쪽으로 봉화산(919.8m)이 보인다. 봉화대가 있어 지금은 봉화산으로 불리고 있지만 고대에는 아막산 내지 아영산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아막 내지 아영은 순 우리말로 어머니란 뜻이며 신라가 반도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모산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봉화산이 된 듯하다. 철쭉으로 유명하여 봄철에 오르면 좋다.
봉화산 동쪽은 좁게는 남강 수계, 넓게는 낙동강 수계로 고대에는 대가야와 신라의 지배를 받았다.
백두대간 남쪽으로는 고남산이 조망된다. 고남산 아래 오른쪽 계곡이 섬진강 지류인 요천이 흐르며 남부여는 요천을 넘어려는 신라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요천의 좌우로 20여개의 산성을 쌓았다. 백두대간과 서측 기슭에 쌓은 신라성이 15여 개임을 감안하면 이 지역이 남부대간 최고의 화약고임을 알 수 있다.
서쪽으로 멀리 천황산이 조망된다. 천황산은 남원 산동면 대상리 귀정사 북편의 산이다. 귀정사(歸政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515년(백제 무녕왕 15)에 현오(玄悟) 스님이 창건했으며 당시의 이름은 만행사(萬行寺)였다. 그 뒤 언제인가 이곳에 이름높은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왕이 이곳에 들러 스님의 법문을 열심히 듣다보니 어느새 3일이 훌쩍 지났고 그제서야 왕은 나라일을 보기 위에 궁으로 돌아갔으므로 절이름을 지금처럼 귀정사로 했다고 한다. 왕이 직접 고승의 주석을 듣기 위해 궁벽한 변방인 이곳 만행사까지 들른 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필자가 추론컨대 제1차 모산성 전투(602년)에서 패배한 무왕이 제2차 모산성 전투(616년)가 염려되어 이곳 만행사에서 유숙하며 3일을 독전하지 않았을까? 천황산이라는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모산성을 공격하려면 귀정사 부근에 사령부를 두고 진두지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만약 패배한다면 귀정사 계곡을 거슬러 천황산 줄기만 넘어면 바로 남부여 거사물현(지금의 남원 보절면과 장수 산서면 일대)의 치소가 나온다. 전선과 가까우면서도 퇴각에 유리한 곳이 산동면 대상리 귀정사 계곡이다. 앞산에는 천문대가 있다.
고남산 아래 요천 계곡
이제부터 아막산성 구간이다.
북벽 성돌들
이정표
시리봉은 시루봉의 오기이다. 시루봉은 보통 테뫼식 산성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테뫼식 산성을 멀리서 보면 떡을 찌는 시루를 닮았기 때문이다.
북벽
멀리 천황산이 조망된다.
우측길이 장수 번암면(요천 상류) 가는 길이고 길 옆 좌측 봉우리에 천문대가 있다.
북벽 석축
북벽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백운산(1278.9m)이 보이고 백두대간이 북으로 주행하고 있다.
북벽의 무너진 석축
봉화산(아막산 또는 아영산 혹은 모산). 이곳 모산성은 모산(지금의 봉화산) 아래 만들어서 통칭 모산성이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성터가 있는 이곳이 모산(혹은 아막산)이라서 붙인 이름은 아니다.
우측으로 번암면 가는 길이 보이고, 중앙으로 천문대, 그 뒤로 천황산이 보인다.
봉화산(모산) 아래 아영분지. 멀리 북으로 백운산이 보인다.
아막성 북쪽의 봉화산. 즉 모산이자 아막산이다.
북벽에서 바라본 아영분지
북벽 아래 석축
봉화산과 백운산. 백두대간으로 북으로 힘차게 주행하고 있다.
장수 번암면 가는 751번 지방도의 윤곽이 보인다.
산성 내부 산책로
아막산성 안내판
산성 내부 산책로. 북문터 부근은 평탄지와 우물지가 있어 당시 건물들이 많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내부 산책로를 오르다가 바라 본 서남쪽 백두대간 줄기
백두대간이 서남쪽으로 주행하고 있다. 이곳 백두대간은 짓재와 아막산성에서 고남산 부근까지 활처럼 휘어져 있다. 따라서 아막산성과 고남산은 직선으로 이어진다. 아막산성의 서남방에 고남산이 있다. 활처럼 휘어진 백두대간과 그 서측 기슭의 계곡들이 당시 나제간에 물고 물리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화약고이다. 오른쪽 제일봉이 고남산이다.
동일한 곳으로 백두대간 서쪽 기슭이다. 장수 번암면 논곡리 배바위 마을 근처로 요천가의 대론리에서 남부여군이 기동하여 꼬부랑재를 넘어 배바위 마을을 지나 백두대간인 새맥이재를 넘기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602년 모산성 전투에서 남부여 좌평 해수는 꼬부랑재 부근의 논곡리 계곡 일대를 장악하고 모산성 전투를 전개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막성과 시루봉 보루 등이 튼튼해 오히려 남부여 4만 군대가 천산 서대택(요천의 깊은 소) 부근까지 밀린 것으로 추정된다.
서남벽 구간의 바위
시루봉. 확인은 못했지만 보루성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시루봉 보루는 복성이 뒷재로 해서 아막성(모산성)으로 기어 오르려는 남부여군을 감시한 아막성의 보조성으로 사료된다. 테뫼식 산성이다. 그리고 시루봉 보루는 그 남쪽의 배바위 마을에서 새맥이재로 오르려는 남부여군을 사치산성과 함께 방어햇을 것이다. 이곳 활모양의 백두대간 구간의 전부는 신라의 보루성으로 다 채워져 있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곳 대간 산행을 하다가 봉우리에 돌들이 발에 채이면 보루성으로 보면 된다.
고남산 서쪽 아래 요천 상류 계곡
행정구역상 고남산 아래 서쪽부터 남원 산동면과 장수 번암면의 경계가 된다.
장수 번암면은 요천의 최상류로 당시에는 남원 산동면과 함께 아막성 일대 신라군을 방어하는 남부여군 최대 방어선을 형성하고 잇다. 번암면 소재지와 산동면 소재지 일대는 무수한 평지성들이 분포하고 잇다. 이것이 바로 요천을 경계로 남부여가 방어선을 구축한 흔적들이다.
천황산
좌측 계곡이 아막성으로 오는 논곡리 계곡으로 이 일대까지 남부여군이 산성을 석축하였다.
천문대와 천황산
서남벽 보루의 바위
시루봉(776.8m)
서남벽 보루에서 동남쪽을 조망하다.
서남벽 내부 산책로
남쪽의 시루봉을 조망하다.
서남벽 내부 산책로
남벽 부근의 평탄지. 건물터로 추정된다.
평탄지
남벽의 석축 흔적
산책로
남벽에서 바라본 아영분지 서쪽. 일대저수지는 봉화산(모산) 아래 첫 저수지이다. 이 물은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른다.
아영분지. 그림자는 누구?
아영분지를 남북으로 나누며 88올림픽고속도로가 동서로 뻗어있다. 사진 중앙의 저지대 능선이 매치로 함양 가는 길이다. 고대에 함양군은 속함군으로 불렷으며 이곳 아영분지 일대의 모산현을 속현으로 삼아 통치하엿다.
아막성의 동쪽 아래는 남원 아영면 월산리 일대로 이곳에서 가야계 고분들이 발견되엇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환두대도가 출토되어 아영분지 일대가 나제 이전부터 지방 유력자의 치소였음이 밝혀졌다. 대가야 멸망 후 신라가 아영분지 일대를 접수하며 속함군의 속현으로 모산현을 둔 것 같다.
서남쪽의 고남산
남쪽의 시루봉
아영분지 북쪽으로 백운산이 조망된다.
지금은 아영분지를 포함하여 이곳 일대를 운봉고원으로 부르고 있다. 필자는 연원이 더 깊은 아영고원으로 불렀으면 한다.
남벽의 돌탑
남벽의 석축 흔적들
백운산
고남산
시루봉
백두대간 산꾼들의 표지기
돌탑
하산하며...
짓재 가는 길. 아막성을 오르려면 짓재에서 이곳 임도로 들어오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역사추론 > 대회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안 사산성(1) : 신라가 여제의 화약고에 뛰어들다 (0) | 2010.10.25 |
---|---|
모산성 전투(2) : 신라가 남부대간을 넘어 섬진강 상류 장악을 시도하다 (0) | 2010.10.21 |
오산 독산성(2) : 부여로와 나당로의 십자 결절지를 장악하라 (0) | 2010.09.06 |
오산 독산성(1) : 부여로와 나당로의 십자 결절지를 장악하라 (0) | 2010.09.06 |
대회전 : 황산벌 전쟁 (0) | 2010.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