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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모산성 전투(2) : 신라가 남부대간을 넘어 섬진강 상류 장악을 시도하다

<2010년 10월 10일>

 

~ 모산성 전투(1)에서 계속 ~

 

 

 표지 - 봉화정에서 바라본 장수 번암면 소재지

 

 아막산성(모산성) 산행을 마치고 짓재(복성이재)에서 장수 번암면 방향의 751번 지방도를 타고 봉화정에 도착한 후 번암면 소재지인 노단리를 조망해본다.

 

번암면 소재지 북쪽에는 동화호가 있다. 백두대간 영취봉에서 큰 산줄기 하나가 가지를 쳐 호남정맥을 이룬다. 동화호 북쪽의 지지계곡 끝자락인 무령고개(혹은 무룡고개)가 바로 호남정맥의 시작점이다. 호남정맥은 내장산까지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를 이루다가 이후 영산강과 섬진강의 분수를 이루며 광양만까지 이른다. 동화호 상류인 지지계곡은 거의 원시림에 가까운 천연의 계곡이었으나 최근 신작로가 나 많이 훼손되었다. 산림장으로 가꾸어 트래킹 코스로 만들었다면 백두대간의 백운산(1278.9m)과 억새가 좋은 호남정맥의 장안산(1236.9m)으로 둘러싸인 지지계곡은 아마도 명소가 되었을 것이다. 개발에 굶주린 단체장들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참으로 아쉽다.

 

 번암면 소재지 오른쪽 동네는 말골마을이다. 말골 마을 뒤로는 계곡이면서도 넓은 들이 나온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면 봉화산의 지능선을 넘어 장수 번암면 동화리가 나온다. 바로 동화호 북쪽의 지지계곡 입구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고개는 봉화산 바로 턱밑이다. 봉화산에는 신라의 보루성이 있어 언제라도 번암면 소재지인 노단리 일대의 남부여 군사 요새를 함락시킬 군사 기동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부여는 동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남부여는 말골 마을은 물론 뒤뜰에도 성지를 구축하여 신라군의 기동에 대비하였다.

 

 봉화정

 

 좌측 계곡은 장수읍 방향의 19번 국도가 지나간다. 19번 국도를 지나다보면 장수 번암면에서 장수읍 경계상에 고개가 있다. 장안산에서 주행한 호남정맥이 이른 수분치이다. 수분치는 한자어 그대로 '물 수', '나눌 분','고개 치'로 물을 나누는 고개이다. 수분치를 지나면 섬진강에서 금강 수계로 진입한다. 수분치 지나자마자 좌회전하면 원수분마을로 진입하는 도로가 나온다. 원수분마을에서 호남정맥인 신무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飛鳳泉]이 나온다. 동화호 상류는 지지계곡의 입구인 동화리이다.

 

 

 

 

 

 번암면 소재지에도 평지성들이 요새처럼 구축되어 있다.

 

번암면 소재지인 노단리는 원노단, 동네터, 하노단, 새터(신기), 말골, 어깨내 등 6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노단을 제외한 모든 자연 부락이 평지성으로 구축되어 있다. 번암초등학교와 번암중학교는 평지성터 위에 학교를 세워서 그런지 지금도 운동장 주변에 석축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 노단리 성터는 동화리 성터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봉화산 일대에서 기동하려는 신라군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지휘부이다.

 

 봉화정에서 바라 본 천황산

 

 봉화대

 

 동화호

 

 번암면 소재지인 노단리 일대

 

 

 

 

 

 

 

다시 복성이재로 돌아와 아막산성 아래 논곡리 계곡을 들어가 보기로 한다. 천문대 부근 도로가에서 바라 본 논곡리 계곡 상류.

 

아막산성 아래 논곡리 계곡. 아래마을이 복성이 마을이다. 멀리 서남쪽으로 지리산 노고단에서 올라온 정령치 부근의 백두대간이 조망된다.

 

 아막산성(모산성 혹은 아영성) 전경

 

 한컷 더. 그 서쪽 아래 계곡이 복성이 마을이다.

 

 아막산성 남쪽으로 시루봉 이하 백두대간이 보인다. 아랫길은 논곡리 계곡 하류로 가는 길. 논곡리 계곡 일대에서 나제간에는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고대 동서 교통로를 보면 남원 평지에서 이곳 논곡리 계곡을 거쳐 아영분지(운봉고원 동편)에 올라 매치를 통해 함양(신라에서는 속함 이라 불렀다)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고대 교통로 간선 상에 아막산성이 요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라가 남부여를 치기 위해서도 아막산성을 거쳐야 섬진강 상류를 차지할 수 잇엇고 남부여 또한 이곳 아막산성을 거쳐야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과 황강 상류를 장악할 수 잇었던 것이다. 602년과 616년 모산성 전투의 지정학적인 배경은 아막산성이 고대 동서 교통로상의 핵심적인 요지라는 것을 말해준다. 

 

 논곡리 계곡

 

 복성이 마을

 

 봉화산 가는 백두대간 길

 

 

 

 논곡리 계곡

 

 

 

 복성이 고개에서 논곡리 계곡 하류로 내려가는 길

 

 논곡리 복성이(성암) 마을

 

 성암 마을 유래가 적혀있다. 도화낙지(복숭아 꽃이 땅에 떨어지는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경로당 옆에 소주병이 한가득하다.

 

 경로당 앞의 성암정.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치열한 혈전의 현장이 동학난에는 최적의 은둔지였고 지금도 궁벽한 외딴 골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격세지감이다. 

 

 복성이 마을 뒤 아막산성 부근

 

 논곡리 계곡

 

 꼬부랑재 부근에서 상류로 바라 본 논곡리 계곡. 이 한적한 계곡이 삼국시대에는 동서 최대의 간선 교통로라고 하면 사람들이 믿을까? 필자가 산성을 답사하는 이유는 고대 교통로를 찾기 위함이었다. 고대에는 산성과 산성을 연결하며 길을 갔다. 따라서 산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곳이 한때 중요한 교통로엿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길목에 산성을 쌓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일대처럼 산성이 집약적으로 분포한다는 것은 한때 이곳을 경계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졋음을 의미한다. 산성과 고분 연구는 이처럼 역사적 기록에서 모호한 부분들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선조들의 기념물이다. 필자가 성돌 하나에도 감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잇다.

 

 

 

 계곡에 내려서니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배바위 계곡 가는 길인 듯하다. 솔직히 이곳이 시루봉산성 남쪽 계곡인 새맥이재 가는 길인지는 모르겟다. 맞는 것 같은데 시간이 되면 답사를 해 볼 요랑이다. 남부여는 논실 계곡을 거쳐 이곳 꼬부랑재 부근에서 아막산성 북쪽의 복성이재와 남쪽의 복성이뒷재를 거쳐 아막산성을 포위한 듯하다. 그리고 배바위마을 가는 길을 거쳐 새맥이재를 통해 백두대간을 넘어 아막산성 일대의 모산현을 장악하려고 몇번이고 시도했을 것이다. 

 

 남부여 아막산성 공격 출발지인 꼬부랑재 부근. 길이 꼬불꼬불해서 꼬부랑재라고 했을 것이다.

 

배바위마을 가는 길로 추정되는 곳.

 

 꼬부랑재 부근은 석산이 개발되어 고대 역사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반추해 볼 마음의 여유를 뺏어갔다.

 

 꼬부랑재 부근. 저 부근에도 산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 답사해볼 때가 있겠지.

 

 한때 나제 젊은이들의 피로 물들였을 논곡리 계곡. 계곡 물은 당시의 절규를 뒤로하고 너무도 조용히 뻔뻔할 정도로 언제 그랬나는 듯 흐르고 있다.

 

시루봉 

 

 시루봉2

 

 석산 앞 도로

 

 

 

 꼬부랑재 부근

 

 

 

 

 

 

 

 배바위 마을 가는 길로 의심되는 곳.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꼬부랑재 부근이다. 물론 이전 의심되는 곳과 거리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계곡으로 내려서니 많이 헷갈린다.

 

 이곳이 꼬부랑재 부근이라면 저 길이 새맥이재 가는 길일터...

 

 석축인지 자연스런 돌무더기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이 꼬부랑재 부근이란 심정이 굳어진다. 다시 한번 답사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 같다.

 

 

 

 

 

 논곡리 계곡 서쪽으로 고남산이 보인다. 필자는 고남산 보루를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천산성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남부여 좌평 해수가 4만의 병력으로 천산성 등 4성 공격에서 패배하고 천산 서쪽의 큰 못 근처에 복병을 숨겨 놓고 신라군과 접전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소위 '천산서대택'이 섬진강의 지류인 남원 요천 일대에 형성된 큰 자연 소(沼) 즉 늪지임을 유추하고 그곳이 고남산 아래 장수 번암면 대론리 원촌마을 부근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시루봉. 시루봉 보루가 보인다. 산꼭대기가 떡시루처럼 보인다. 테뫼식 산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꼬부랑재 부근이며, 앞으로 보이는 길이 새맥이재 가는 계곡이다.

 

 고남산

 

 

 

 이곳은 새맥이재 가는 길이 아님을 확실히 알겠다.

 

 모퉁이만 돌면 논곡리 계곡 길은 끝이난다.

 

 서쪽의 고남산. 서녁 햇살 때문인지 고남산은 자꾸 어둡게 나온다.

 

 사루봉

 

 시루봉2

 

 모퉁이만 돌면 논곡리 계곡은 끝이나고 백두대간 모래재 가는 길인 유정리 계곡이 나온다.

 

 고남산 북쪽의 백두대간 지능선. 이 지능선을 넘어 남부여군이 모래재에서 유정리 계곡으로 내려오려는 신라군을 방어하였다.

 

고남산 북쪽의 백두대간 지능선. 보이는 고개는 느질목재로 남원 산동면 월석리 석동마을 부근의 남부여군이 이 고개를 넘어 신라군이 유정리 계곡을 거쳐 요천까지 나오려고 한다면 이곳에서 퇴로를 차단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느질목재 위쪽의 봉낙골재 또한 남부여군이 유정리 계곡으로 내려오려는 신라군의 후위를 차단하는 길목이다. 이처럼 남부여군은 백두대간 서쪽 기슭의 턱밑까지 요새를 구축하고 신라군과 대치하였던 것이다. 이 운봉고원 일대에는 6개 권역에서 나제군이 상호 대치하였던 성터의 흔적들이 확인되었다. 이 일대가 나제간 최대 화약고라는 사실이 헛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바로 40여개에 이르는 성지 유적이다.

 

 논곡리 계곡을 거의 빠져 나오자 동남방으로 백두대간 모래재로 올라갈 수 있는 유정리 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쪽으로 봉낙골재 가는 길이 보인다.

 

 봉낙골재 동쪽의 언덕도 성터로 추정되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안봐도 비디오 아닌가?

 

논곡리 계곡과 유정리 계곡이 만나는 유정삼거리 부근. 앞에 보이는 도로는 88올림픽고속도로이다. 지금의 88도로는 유정리 계곡을 거쳐 모래재(사치)를 넘어 간다. 하지만 88도로 개통 이전에는 모래재 및 고남산 남쪽의 여원재로 함양가는 24번 국도가 지나갔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간선 도로망은 바귀기 마련이다. 고대에는 최고의 간선 도로가 복성이재(짓재)였다면 국도 개통 후에는 여원재, 88도로 개통 후에는 모래재(사치)가 주요 간선 도로망인 것이다. 전대에 보조 고개들이 토목 기술의 발달로 간선 도로의 주요한 고개가 된 것이다.

 

 유정삼거리 부근의 당동마을 가는 길. 모래재(사치) 가는 유정리 계곡 길이다.

 

 유정 삼거리 이정표

 

 모래재 가는 유정리 계곡 전경. 오른쪽으로 88도로의 차들이 휭하고 지나간다.

 

 유정리 계곡의 요지를 점하고 있는 느질목재 동쪽의 구릉. 필자가 남부여 장수였다면 이곳에 보루를 설치하여 논곡리와 유정리 계곡 쌍방향에서 내려오는 신라군을 방어했을 것이다. 성지가 있다는 것에 99.9% 건다.

 

 88도로 옆의 유정삼거리 이정표

 

 논곡리 계곡과 유정리 계곡의 물이 유정삼거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사진에서 보이는 서쪽 대론리 원촌 마을에서 요천으로 합강한다. 아마 원촌 마을 부근이 '천산서대택'이라는 큰 늪지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은 원촌 마을을 비롯한 대론리 일대가 마을이나 농경지로 메워졌지만 이 일대의 토양을 파보면 지금도 진흙이나 모래가 수도 없이 많이 출토된다고 한다. 원촌 마을 일대가 '천산서대택'임이 분명하다. 멀리 천황산이 조망된다.

 

 유정리 계곡 상류

 

 유정리 계곡 하류 요천 합강지점

 

 88도로가 활처럼 휘어지며 원촌마을 주변을 지나가고 있다. 원촌마을 서쪽은 백두대간 지능선이 북쪽으로 힘차게 뻗어 요천을 남벽을 이루며 가로막고 있다. 번암면 일대 여러 계곡에서 형성된 요천이 남으로 힘차하게 흐르다가 이곳 원촌마을 부근에서 남벽을 만나 땅이 깊이 패이면서 자연 소 즉 늪지를 형성했을 것이다. 결국 요천의 물이 일시적으로 북류하여 원촌마을 일대까지 집어삼키며 '천산서대택'을 만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논곡리와 유정리 계곡 일대의 물도 이곳 원촌 마을 부근에서 유입되었으니 '천산서대택'은 남부여의 자연방어선으로 당연히 천산서대택을 배로 건너지는 않고 산동면 월석리 석동마을 성터에서 느질목재를 넘어 현재의 유정삼거리에 도달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원촌마을 가기 전 도로가에 의병장 전해산 장군 묘가 있어 잠시 들렀다.

 

 의병장 전해산 장군 부부 묘. 1910년 전해산 장군이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자 부인도 따라 자결하였다고 한다. 애국과 사랑을 완성한 분들이 그나마 다정하게 쌍분을 이루고 잠들었다고 생각하니 존경과 부러움의 염이 솟구쳐 오른다. 하늘도깨비는 애국은 커녕 아직도 애욕의 번뇌에도 소스라치게 작아지니 어쩔런고... 쯧쯧

 

 원촌마을 앞 소(沼)

 

 

 

 전해산 장군 묘 전경

 

 88도로 밑의 원촌마을 소

 

 원촌마을 가는 다리.

 

 원촌마을 앞 88도로 밑의 요천과 정자. 고대에는 이 일대가 늪을 이루고 있었었을 것이다.

 

 지나온 유정리 계곡 입구

 

 지금은 이 일대의 여천이 매우 작아졌지만 마을과 농경지로 간척되기 전에는 매우 넓은 늪지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앞 절벽이 백두대간의 지능선으로 요천의 남벽을 이루고 있다.

 

 요천

 

 

 

 

 

 원촌마을. 마을의 땅을 파면 모래가 많이 출토된다고 한다. 이 일대가 과거에는 늪지였음을 증명하는 사실이다.

 

 

 

 

 

 

 

 보기 보다는 물이 깊다고 한다.

 

 

 

 천산서대택의 현장

 

 4만의 남부여군을 이끌고 신라의 천산성 등 4성 공격에 실패한 좌평 해수는 최후의 일전을 천산서대택에서 벌이기로 작정하고 복병을 숨겨둔다. 해수는 신라 장군 무은의 갑병 1천을 격파하였으나 귀산과 추항의 분전으로 남부여군이 패퇴하고 섬진강 상류까지 신라군에게 허용하고 만다.

 

 

 

 

 

 

 

 

 

 수심이 깊다는 경고문

 

 혹 있을 사고에 대비해 구명조끼를 비치해 두었다. 경고문과 구명조끼를 보면서 이곳이 천산서대택이라는 확신이 든다.

 

 대론 삼거리 근방에서 바라 본 고남산과 요천 계곡

 

 

 

 고남산이 천산이라는 확신은 이 대론삼거리와 원촌 마을 일대가 천산의 서쪽인 대택이라는 것에 있다.

 

 

 

 대론삼거리.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