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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천안 사산성(1) : 신라가 여제의 화약고에 뛰어들다

<2010년 10월 15일>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안성나들목에서 나와 1번 국도 가에 있는 국보 7호 <봉선 홍경사 갈>을 둘러보고 사산성에도 올랐다.

 

 

 표지 - 사산성 정상에서 바라 본 서쪽의 금북정맥

 

소나는 백성군 사산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심나는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몸이 가볍고 날랬다. 사산의 경계가 백제와 서로 섞여 있어 상호간에 침략하여 뜸한 날이 없었다. 심나가 싸울 때마다 그 앞에는 견고한 진지가 없었다. 인평(仁平) 연간(634~647년)에 백성군에서 군사를 내어 백제 변경 읍을 침략하였는데, 백제가 정예 군사를 내어 갑자기 이를 치므로 우리 군사들이 질서 없이 퇴각하였으나 심나는 홀로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성난 눈으로 크게 호통을 치면서 수십 여명을 베어 죽이니 적들이 무서워서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그만 군사를 이끌고 달아났다. 백제 사람들이 심나를 가리켜 신라의 비장(飛將)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이르기를 ‘심나가 아직 살아있으니 백성(白城)에는 근접하지 말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소나열전>


 <소나열전>에 의하면 소나의 아버지 심나는 인평(선덕여왕의 연호) 연간 즉 634~647년 중에 신라의 변경인 백성군의 장수로 활약하였다. 아들인 소나가 백성군 사산현 출신인 것으로 추정컨대, 심나는 백성군 중에서도 백제와 국경이 상착(相錯) 중인 최전방 사산성을 지키던 장수로 사료된다.

 <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2조>에 의하면, 신라 백성군의 속현으로 적성현과 사산현이 있다. 백성군은 고구려의 나혜홀, 적성현은 고구려의 사복홀, 사산현은 고구려의 사산현으로 백성군 지역이 오랫동안 고구려의 영유하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백제 성왕 이전의 여제간 국경 또한 사산 지역을 위시한 백성군 일대였음을 의미한다.

 칠장산에서 분기한 금북정맥은 엽돈재 부근에서 분기하여 만뢰지맥을 만들고, 성거산 걸마고개 부근에서 분기하여 영인지맥을 형성한다. 당시 나제간의 국경은 대체로 금북정맥의 지맥인 만뢰지맥과 영인지맥에 부근으로 사료된다. 그 이유는 문헌적으로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의해 확인되며, 유적상으로 관방유적인 성곽과 봉수대가 두 지맥 부근에서 집중적으로 분포하기 때문이다. 사산현은 오늘날의 직산 부근으로 영인지맥의 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사산성은 직산관아와 직산향교가 소재한 옛 직산 고을의 북쪽에 있는 표고 176m인 성산의 주봉에 약 750m 규모의 퇴뫼식(산정식) 산성이 있고, 이 퇴뫼식 산성의 동서 양단에서 북으로 연장해 북향으로 흐르고 있는 작은 계곡을 포용하여 축조한 길이 1,030m의 포곡식 산성으로 구성된 복합식 산성이다.

 사산성의 출토유물은 토기류와 와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토기류 중 보시기류나 호류(壺類)는 5세기 내지 6세기 전반의 백제-고구려의 영유기와 관련되고, 단각고배(短脚高杯)를 비롯한 신라계 유물들은 6세기 후반 신라 진흥왕의 영유 팽창 이후에 속하는 유물들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진흥왕이 관산성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후 백제의 한강 하류 전역을 탈취하고 당항성을 개척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선덕여왕 당대까지도 백성과 사산성을 둘러싸고 안성천 근역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신라는 삼한통일 얼마전에 안성천 유역을 석권하고 당항성을 통해 나당동맹을 결성한 것이지 관산성 전쟁 직후인 550년대 후반 무렵 나제간의 화약고인 안성천 전역을 장악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삼국은 이곳 안성천 유역에서 남부여 멸망시까지 물고 물리는 접전을 벌였던 것이다.  

 

 

 <봉선 홍경사 갈> 입구

 

 안내문. 봉선은 '선대 임금을 받들다'는 뜻이고, 홍경사는 사찰 이름이며, 갈은 비석의 뜻으로 추정컨대 임금처럼 높은 사람이 내린 비를 존칭하여 부르는 이름인 것 같다. 자전에는 우뚝솟은 비란 뜻이 나와 있다.

 

 전경

 

 이수. 고대에는 이 주변이 늪지라서 그런지 이무기를 조각한 것 같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 특이하다고 한다.

 

비문

 

 비문

 

 

 

 이무기를 정면에서 보니 측면보다는 무섭게 느껴진다. 얇게 조각해서 그런가 보다. 어명의 엄격함을 수행하느라 천년 가까이 무거운 비를 짐어지고 있는 이무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탑은 흔적만 남아 있다. 그래도 이곳이 봉선홍경사였다는 유일한 기념물이다.

 

 

 

 <홍경사 갈>의 남쪽으로 사산성이 보인다. 홍경사갈이 위치한 이곳은 평택과 천안을 잇는 1번 국도가 지나간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전 까지만 해도 이곳이 남북을 잇는 최고 교통의 요지였다. 이는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주변이 갈대만 무성한 못이엇고 인적도 한적하여 강도들로부터 교통로를 보호하기 위해 홍경사라는 사찰과 광연통화원이라는 여행자 숙소를 짓게 되엇던 것이다. 고대에는 주요 교통로 상에 산성이나 사찰을 지어 간선 도로를 보호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주요 고개마다 산성을 축조하여 적군과 도적떼를 방어하였으며, 통일국가 이후에는 신라와 고려 모두 사찰과 원을 주요 교통로 상에 배치하여 간선 도로망을 확보하였다. 승군이 탄생한 것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였다. 홍경사처럼 늪지의 한적한 곳은 강도들이 자주 출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체 보위 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특히 국가의 지원 아래 행하여졌다. 고려시대에 외적이 공격해 올 경우 승군들이 자주 봉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려 때 승군들은 지금의 지역 방위군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스님들이 칼을 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서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넘어가는 고개도 고대에는 주요 간선도로였는데 이곳에도 혜음원이라는 숙소와 사찰을 건립하여 고개를 보호하였다. 지금도 혜음원의 이름을 따서 고개이름을 혜음령이라고 한다. 홍경사와 광연통화원과 성격이 동일하다.

 

 홍경사갈 남쪽

 

 홍경사갈 동쪽

 

 사산성. 고대 주요 교통로 상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 사산성을 지나면 천안이 나온다. 여기서 영남과 호남이 갈리는 천안삼거리가 있다. 비록 신라는 안성천 상류에서 서진하여 사산성을 점령하였지만, 신라 등장 이전에는 이곳이 여제간의 치열한 화약고였다. 삼국이 사산성을 두고 치열한 각축을 벌였던 이유가 고대 남북로 간선의 요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신라가 사산성을 확보한 이후 당항성까지 개척함으로써 나당군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봉선 홍경사 갈>의 입구로 바로 1번 국도가 지나간다.

 

봉선홍경사갈에서 1번 국도를 타고 성환읍에서 입장, 진천가는 34번 국도로 좌회전하면 직산읍 군서리가 나온다. 군서리 직산초등학교 뒷산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사산성이 나온다.

 

 

 

 꼬맹이들

 

 직산초등학교

 

 직산초등학교 좌측에는 직산현 관아가 있다.

 

 

 

 호서계수아문

 

 

 

 

 

 

 

 

 

 

 

 

 

 

 

 

 

다시 초등학교로 들어가면 진달래동산 이정표가 나온다.

 

 관아와 초등학교 사이

 

 진달래동산 가는 길. 관아 좌측으로 돌아가도 된다.

 

 동남쪽으로 금북정맥상인 성거산이 조망된다.

 

 관아 뒤편

 

 

 

 진달래 동산

 

 야외 학습당

 

 산책길

 

 옆길로 살짝 빠져 묘지에서 성거산을 조망한다.

 

 

 

 좌측 산줄기는 위례산이다.

 

 

 

 

 

 

 

 북쪽으로는 안성천 이북의 경기도 평택 소사벌이 조망된다. 우측 산은 안성분기점 부근의 백운산(190m) 줄기인 듯하다.

 

 신라가 사산성까지 진출한 것은 안성천 일대 장악이 시간 문제라는 의미이다.

 

 군서리 내려가는 임도. 멀리 동쪽으로 금북정맥이 조망된다.

 

 폐기물 처리장 연기가 산책로 지척에서 나오고 있다.

 

 

 

 

 

 안내판

 

 본격적으로 산성 구간이 시작된다.

 

 

 

 

 

 만경사 가는 길

 

 정상가는 길로 테뫼식 산성 구간이다.

 

 산책로상의 기와 조각들

 

 평탄지로 건물지로 추정됨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오심죽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산성 입구 문지 기둥의 초석 받침인데, 종중 묘소 이전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2

 

 

 

 성문터인가?

 

 구절초

 

 

 

 

 

 정상의 사산성 표지석이 보인다.

 

 

 

 

 

 

 

 

 

 

 

 동쪽으로 금북정맥상의 성거산이 조망된다. (오심죽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백제 산성의 특징은 익성(翼城) 구조라고 합니다. 즉 위례성을 중심으로 성거산성은 우측 날개가 되고 서운산성은 좌측 날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거산성은 일명 우성산성이라고 하고 서운산성은 좌성산성이라고 합니다.)

 

 성거산 좌측의 위례산(523m) 위례성.

 

~ 천안 사산성(2)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