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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보은 매곡성과 호점산성(2) : 신라가 금강 도하를 꿈꾸다

<2010년 10월 17일>

 

~ 보은 매곡성과 호점산성(1)에서 계속 ~

 

 

 표지 - 호점산성 들어가는 성안골 입구과 호점산성 전경

 

 호점산성은 둘레가 2.5km에 육박하는 대청호 연안 최대의 산성이다. 매곡성과 호점산성은 고려말 무신(武神)으로 추앙받는 최영 장군에 대한 전설이 깊이 베어있는 비밀스런 성터이다. 최영은 1358년 양광(지금의 충청도)전라도 왜구체복사가 되어 왜구를 격파하였고, 1359년과 1361년에 홍건적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양광도 주민들에게 최영은 민초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실제 호점산성은 금강 연안의 장기 농성으로서 최영 장군이 수축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험준한 지형에다 거대한 산성을 축조한 목적이 금강 연안으로 침략하는 왜구의 방어말고 달리 이유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호점산성의 초축 연대는 좀더 거슬러 올라갈 것 같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나제간의 국경지대였으며, 신라말에는 왕건과 견훤이 서로 대치하는 최전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말 매곡성주 공직은 처음에는 견훤의 복심이 되었으나, 930년 견훤이 고창전투에 패배한 이후인 932년 6월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이후 매곡성은 이웃 후백제 권역이던 일모산군의 공세에 시달렸다. 이에 공직이 주청하여 귀부 다음달인 932년 7월에 왕건과 함께 일모산성을 함락시키게 된다. 매곡현과 일모산군의 주요 교통로는 먹티와 염티재인데, 염티재를 방어하는 산성이 바로 호점산성이다. 따라서 규모는 고려말보다는 작았을지라도 신라 말 호점산성이 존재하였으리란 짐작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나제간의 대회전 당시에도 신라입장에서는 금강과 회인천이 만나는 입구를 방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호점산성의 초축 상한이 올라갈 개연성은 농후하며, 다만 발굴 유물의 양이 부족하여 현재 호점산성의 초축 상한이 고대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호점산성의 성벽 단면

 

 

 

 

 

 말라가는 고사리. 아, 가을이 깊어가고 있구나!

 

 

 

 

 

 

 

바위지대

 

 

 

 

 

 

 

 떡처럼 잘 포개놓았다.

 

 

 

 

 

 

 

 

 

 

 

 기묘한 소나무 가랑이 사이로 성벽의 단면이 드러난다.

 

 호점산성의 축성방식은 기존 산성과는 다르다. 보은문화원의 자료 설명에 따르면 석축의 양상은 대략 4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그리고 세부 지형에 따라 다른 축조 방법이 적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축조 시기나 축조 집단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연구된 바가 없다. 짐작컨대 호점산성은 고대 나제간의 대회전 당시, 신라말 왕건과 견훤의 대립,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성, 왜란 이후 장기 농성의 기능 등으로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만약 호점산성에 대한 깊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고대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향토 연구뿐 아니라 우리 역사에 대한 통시적 이해가 더 풍부해지고 깊어질 것으로 사료된다. 보은군은 관광자원 개발에 앞서 미스테리한 호점산성 발굴조사에 심혈을 기울여 철저하게 한다면 상상하는 그 이상의 관광자원을 보유할지도 모르겠다. 보은군 화이팅!

 

 

 

 

 

 

 

 

 

 

 

 

 

 

 

 

 

 참 걷기 좋은 산책로이자 산성 회곽로이다.

 

 산성 구조물이 약하니 조금 주의하면 퍼펙트한 좋은 산행이 될 것 같다.

 

 

 

 

 

 

 

 

 

 성문터로 사료된다. 회남면에는 남대문리가 있다. 호점산성 남대문 아래 마을이 남대문리이다. 이곳이 남대문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래 남대문리에서 만마루 마을 지나면 바로 고대 일모산군인 문의면 가는 염티재가 나온다. 일명 소금재인데, 서해안에서 들어온 소금을 짊어지고 문의에서 보은으로 향하던 고개라서 염티재라고 한다. 염티재 북쪽은 먹치인데 그 사이에 왕재가 있다. 호점산성의 축성 목적은 염티재와 왕재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고대에는 염티재가 물자가 운송되던 중부 지역 간선도로망이었고 이를 보호하고 감시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금강 서안의 남부여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회인천과 금강이 합강하는 부근을 감시할 목적도 동시에 있었다.

 

 성문터

 

 

 

 

 

산성 내부

 

 

 

 

 

 서벽 보루

 

 

 

 

 

 보루 내부는 평탄지가 있다. 건물지였을 것이다.

 

 서벽 보루에서 남대문 마을로 내려가는 산책로가 있다.

 

 치알봉 이정표

 

 평탄지

 

 치알봉 가는 산책로이자 남벽 구간임

 

 산성 외부로 수풀에 가려 있지만 아래로 회인천이 흘러 금강(대청호)으로 들어간다.

 

 사진 아래로 대청호로 들어가는 회인천이 희미하게 보인다. 수풀만 조금 제거하면 아주 훌륭한 산행 코스가 될터인데... 보은군 화이팅!

 

 

 

 아주 호젓하고 기분좋은 산책로

 

 치알봉 정상. 치알봉은 호점산성 내 남쪽 제일 높은 봉우리로 해발 358.9m이다. 햇빛을 가리거나 비를 피하는 장막을 일러 차일(遮日)이라 하는데, 치알도 이말에서 기원한다. 남쪽 봉우리가 너무 높아 성 내부에서 보면 햇빛을 가린다고 해서 치알봉이라 부른 것 같다.

 

 

 

 354봉 가는 길

 

 

 

 이 이정표에서 계곡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용머리 방향으로 내려갔다.

 

 용머리 방향 산책길

 

 내려오면서 바라 본 신대리 계곡. 왕재가는 길로 고대에는 염티재와 더불어 일모산군(지금의 문의면)으로 갈 수 있다.

 

 

 

 용머리 입구

 

 산 중앙이 354m봉이다. 거기서 계곡 쪽으로 내려서야 동문터로 갈 수 있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무시하고 용머리로 내려왔다. 이정표 방향이 이상해서 용머리로 내려왔는데 지나고 보니 필자의 착각이었다.

 

 

 

 용머리에서 바라 본 용곡리 계곡

 

 용곡리 계곡 하류 방향

 

 

 

 성안골 계곡. 계곡이 좁아 성문터로 가장 효율적이다.

 

 

 

 사진 중앙 능선이 동문터로 지향하는 것 같다. 354봉에서 이정표 보고 저 능선따라 내려와야 했다.

 

 성안골 들어가는 길

 

 호점산성 전경

 

 

 

 

 

 원 위치 회귀. 주차장.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성안골 계곡은 협곡으로 동문터 부근이 좁아 산성 방어에 효율적이다. 그리고 다른 방면은 사방이 경사도가 가팔라 성벽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다. 주 계곡인 성안골 말고도 7~8개의 작은 계곡들도 많아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도 있고 또한 식량 저장만 잘 되어 있다면 수원도 풍부하여 장기 농성으로서의 기능이 거의 완벽하다.

 

 최초 주차장 옆 산책로로 올라가서 354봉에서 능선따라 내려와 동문터에 이르러야 산성 답사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