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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관산성 전쟁 (1) : 옥천 삼성산성~용봉산보루~동평산성~마성산성

<2011년 1월 9일>

 

 

 

표지사진 - 우측 우람한 산이 고리산성이고, 맞은편 좌측 산이 노고산성이다. 관산성 전쟁 당시 남부여군은 이 일대에 포진하며 신라군을 위협하였다. 

 

 

삼성산 등산 안내도. 옥천읍 삼양리 현대아파트 뒤편 산행길이다. 간만에 관산성 일대를 산행한다.

 

 

옥천읍 전경

 

 

 

 

 

 

 

 

정자

 

 

옥천읍 시내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동북방.

 

 

동남방. 4번 국도가 영동읍으로 향하고 있다. 4번 국도는 고대에도 나제간 주요 동서 교통로와 거의 일치할 것으로 사료된다. 신라군이 이곳 옥천 일대로 침공한 주요 루트로 보인다.

 

 

남쪽

 

 

4번 국도가 직선으로 향하는 사진 중앙의 산이 옥천읍, 동이면, 이원면의 경계가 되는 도덕봉(407m)이다. 도덕봉 남서 아래 고개가 솔치인데, 고대에는 이 길로 해서 영동으로 갔다. 그런데 솔치 주변에 도적떼가 극성을 부려 지금의 4번 국도가 나 있는 구집티로 우회해서 이원면과 영동으로 갔다고 한다. 원래 도둑봉으로 불리다가 후대에 와서 어감이 좋은 도덕봉으로 고쳤다고 한다. 전국에는 도덕봉이 많은데 대부분 산적들이 출몰하던 도둑봉에서 유래했다고 보면 틀림없다. 

 

 

쉼터

 

 

옥천 시가지 전경

 

 

삼성산성 가는 길

 

 

삼성산성 내부

 

 

삼성산성 설명판

 

 

석축의 흔적

 

 

남쪽으로 우측 앞 능선 제일봉인 마성산성이 보인다. 신라군은 소리산현(옥천군 이원면 일대)에서 솔치를 넘어 고시산군(옥천읍 일대)으로 들어와서 마성산 일대에 산성을 쌓고 이곳 삼성산성 일대의 남부여군과 대치한 듯하다. 마성산 뒤로 충남 제일봉인 서대산(904m)이 보인다. 마성산 좌측 뒤로 용암사 뒷산인 장용산(656m)이 보인다.

 

 

용봉산(437m). 보루가 있다.

 

 

삼성산성이 신라 고시산군의 치소로 사료된다. 삼성산성 인근에는 동북쪽으로 삼양리토성과 서산성이 있어 이 일대가 모두 관산성으로 사료된다. 지금의 삼양리사거리 경찰 초소 부근이 나제간 주요 교통로로 이곳이 나제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진터벌이다. 지금은 교각이 놓여 교통이 편리하지만, 고대에는 소옥천(서화천)이 굽이 굽이 돌며 절벽을 이룬 곳이라 지금의 삼성산성, 삼양리토성, 서산성이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방어하고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태자 여창이 이곳 공격에 주력하다가 그만 신주 김무력 부대의 급습을 받아 고리산에서 포위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옥천이 배출한 한국 최고의 서정시인 정지용의 시비

 

 

산성 내부

 

 

 

 

 

고리산 일대가 조망된다. 태자 여창이 주둔한 고리산성이 있다. 고리산성은 <일본서기>에는 '구다모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남문터 부근. 산성이 남쪽을 방어한 것으로 보아 애초 이 산성의 주인은 백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남문 아래가 주 침공로로 이용되었다. 이 고개는 쌍방간 양보하기 어려운 곳으로 이곳이 뚫리면 관산성이 포위될 가능성이 높다.

 

 

남문터 아래로 내려가는 길

 

 

옛 성돌을 가져다 참호를 만들었다. 물론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한국전 당시 북한군이 대전을 접수하고 추풍령을 넘기 위해 이곳을 통과하여 이원면에 이르러 금강을 도하하여 영동읍으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전쟁의 개념이 바뀌어 이러한 참호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고대부터 한국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의 전개 양상은 주요 교통로상의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국전쟁사를 잘 고찰해보면 고대 삼국간의 전쟁 전개 방식과 그 위치를 가늠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건너편 봉우리에도 분명 보루의 흔적은 있을 것이다.

 

 

남문터 부근

 

 

석축의 흔적

 

 

나무사이로 시간의 흐름속에 흘러내린 성돌들로 가득하다.

 

 

 

 

 

내려와서 보니 남문터 부근이 아득하다. 실지로 이곳이 남문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산책로가 나 있어 추정할 뿐이다. 옥천군은 관산성 일대를 관광 코스로 개발하여 적극 홍보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성왕이 참수당한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 '구진베루' 절벽도 역사적 의미가 가미되면 심상치 않은 유적이 될 수도 있다. 유형의 유적 뿐 아니라 무형의 역사적 사실도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유적이 될 수 있다.

 

 

삼성산성 남쪽 아래 고개. 완전히 이 일대를 답사하지는 못했지만 이 고개 아래에 말무덤이 있었던 것 같다. 말무덤은 전쟁 당시 희생당한 말을 묻은 무덤일 수도 있지만 필자는 군인들의 주검을 함께 묻은 큰 무덤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군서면 내려가는 길

 

 

옥천읍 내려가는 길

 

 

용봉 가는 산책로

 

 

저 끝에도 보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의 동벽을 이루는 식장산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식장산 북쪽으로 노고성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식장산 일대의 산성들이 뚫리면 대전 전역이 신라군이 차지하므로 남부여군은 이곳 관산성 일대를 점령하여 화근을 뿌리 뽑을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관산성 전쟁은 규모도 컸으며 치열했던 것이다.

 

 

좌측의 노고성과 우측의 고리산성(환산성). 사진 중앙의 아래 서화천이 휘도는 부분이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 '구진베루'라는 절벽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삼년산군(보은읍 일대) 출신 고간 도도의 군대가 매복하여 성왕을 포로로 잡고 참수한 곳이다.

 

 

고간 도도는 필자가 서 있는 이곳에서 성왕이 떴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군사들을 매복시켰을 것이다. 성왕은 무엇이 그리 바빠 안전한 길을 택하지 않고 지름길로 가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이 또한 성왕과 남부여의 운명이란 말인가?

 

 

되돌아보니 삼성산성 봉우리가 보인다.

 

 

서화천은 굽이 굽이 능선을 휘감으며 북류하여 금강(지금의 대청호)으로 합류한다. 앞 능선이 '구진베루'가 있는 월전리이다. 멀리 고리산이 보인다. 태자 여창이 아버지 성왕이 참수당했다는 비보를 듣고 고리산성에 피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아! 남부여의 꿈이여! 여기서 정녕 피를 토하고 스러지고 마는 것인가?

 

 

 

 

 

식장산

 

 

노고성

 

 

구진베루와 고리산

 

 

구진베루 일대

 

 

멀리 남쪽으로 용봉산 보루가 보인다.

 

 

 

 

 

 

 

 

동쪽으로 옥천 들이 조망된다.

 

 

 

 

 

용봉산 보루

 

 

식장산

 

 

노고성 부근

 

 

고리산과 구진베루

 

 

좌측의 노고성, 우측의 고리산성, 서화천이 휘돌아가는 구진베루.

 

 

한컷 더!

 

 

식장산~노고성~고리산

 

 

우측 낮은 능선이 동평성 일대, 좌측 높은 능선이 마성산성, 뒤 제일 높은 봉우리가 서대산.

 

 

옥천읍 삼청리 일대 들판과 도덕봉.

 

 

식장산 줄기와 노고성

 

~ 관산성 전쟁 (2)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