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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관산성 전쟁에 대하여

관산성 전쟁

 

1) 관산성 전쟁에 대한 반도와 열도의 현존 기록

 

진흥왕 15년(554) A. 백제의 왕인 명농(明襛)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B. 신주(新州)의 군주인 김무력(金武力)이 주(州)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C.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조>

 

문무대왕은 이미 영공(英公)과 함께 평양을 격파하고 돌아오며 남한주(南漢州)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襛王)이 고리산(古利山)에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침략하고자 꾀하고 있을 때 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 각간이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을 맞받아 공격하여 승기를 타고 그 왕 및 재상 4명과 군사들을 사로잡아 그 예기를 꺾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 서현은 양주총관(良州摠管)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변방의 백성들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편안히 하였고, 임금과 신하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나랏일에 골몰하는 근심이 없어졌던 것이다. 지금 유신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 사직의 신하가 되어 나아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재상이니 공적이 뛰어나다. 만약 공의 집안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직위와 상을 과연 어떻게 하여야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진실로 대왕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김유신 열전>

 

성왕 32년(554)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仇川)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조>

 

흠명천황 15년(554) 겨울 12월 A. 百濟가 下部의 杆率 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百濟王 臣 明과 安羅에 있는 倭臣들, 任那 여러 나라의 旱岐들은 아룁니다. 斯羅가 無道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斯羅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有至臣을 보내시니,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東方의 領인 物部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有至臣이 데리고 온 백성 竹斯 物部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 달 9일 酉時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B. 따로 아뢰기를 “만약 新羅뿐이라면 有至臣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狛이 斯羅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毾㲪 1領, 도끼 300口, 사로잡은 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적어 송구합니다.”라고 아뢰었다. C. 餘昌이 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耆老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餘昌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新羅國에 들어가 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D. 그 아버지 明王은 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新羅는 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新羅에서 佐知村의 飼馬奴 苦都[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苦都는 천한 奴이고 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苦都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明王이 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묻었다. [다른 책에는 “新羅가 明王의 頭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이 明王의 뼈를 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E. 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新羅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 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餘昌이 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 [鞍橋는 우리 말로 矩羅膩라 한다.] F. 이 때 新羅 장수들이 百濟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日本 天皇이 任那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百濟官家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조>

 

 

 

좌측 능선이 식장산이다. 식장산 능선은 성왕 대 당시 남부여의 동쪽 국경 역할을 하였다. 오른쪽 끝 능선이 고리산성이다. 태자 여창이 남부여 군을 이끌고 주둔한 지휘소이다. 고리산성 서남쪽 즉 좌측 맞은편이 노고산성으로 남부여는 고리산성과 노고산성 일대에 주둔하며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용봉산성 북쪽 아래로 관산성으로 알려진 삼성산성과 지근거리이다. 동서로 대치한 능선 사이로 소옥천(서화천)이 흐른다. 이곳이 구천이다. 성왕은 고리산성의 태자 여창을 만나기 위해 구천을 가로지르다 관산성 아래 '구진베루'라는 지역(사진에서는 우측 노고산성 아래이다. 이곳이 옥천군 서면 월전리 군전마을이다.)에서 삼년산군 출신 고간 도도의 기습을 받아 참수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우측 앞 능선(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능선)이 관산성으로 알려진 삼성산성이다. 그 북쪽으로 보이는 우람한 능선이 바로 태자 여창이 주둔한 고리산성이다. 좌측 앞 능선이 용봉산성이다. 사진을 찍은 곳은 동평산성 지난 첫번재 봉우리이다. 이곳 옥천 서쪽의 삼성산성~용봉산성~동평산성은 신라군이 주둔한 곳이다.

 

2) 관산성 전쟁의 전개 과정

 

남부여는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남부여가 노린 곳은 관산성이었다. 관산성은 신라 고시산군의 치소로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일대이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조> 기사에는 ‘함산성(函山城)’으로 나온다.

 

A. 百濟가 下部의 杆率 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百濟王 臣 明과 安羅에 있는 倭臣들, 任那 여러 나라의 旱岐들은 아룁니다. 斯羅가 無道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斯羅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有至臣을 보내시니,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東方의 領인 物部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有至臣이 데리고 온 백성 竹斯 物部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 달 9일 酉時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조>

 

 <삼국사기>는 관산성 전투가 6~7월에 발생한 것으로 나오지만, <일본서기>에는 남부여 와 왜 연합군이 함산성을 554년 12월 9일에 함락시킨 것으로 나온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남부여와 가야 연합군이 관산성을 기습한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가량’은 가야를 의미한다.


 

A. 백제의 왕인 명농(明襛)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조>

 

 그런데 성왕은 관산성 함락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확전을 기도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군사가 필요하였다.

 

B. 따로 아뢰기를 “만약 新羅뿐이라면 有至臣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狛이 斯羅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毾㲪 1領, 도끼 300口, 사로잡은 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적어 송구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조>

 

 <일본서기>에는 성왕이 흠명천황에게 죽사도 즉 축자도의 군대를 더 요청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가야를 돕겠다고 약속한다. 한편 남부여 귀족들은 성왕의 확전 기도에 불만이 팽배했다.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태자 여창에게 기로들이 경계의 훈을 날렸다. 이에 대해 아버지 성왕과 생각이 같은 태자 여창은 기로들이 늙어 겁낸다고 비꼬았다. 부자지간에 이처럼 죽이 맞을 수도 있을까?

 

C. 餘昌이 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耆老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餘昌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新羅國에 들어가 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조>

 

 태자 여창은 기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국경을 넘어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고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이참에 신라를 끝장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아버지 성왕은 열도의 군대를 협박 반 사기 반하여 군대를 끌어 들이고, 아들인 태자 여창은 남부여 내부 귀족들의 반대를 잠재우고 아버지가 끌어 들인 외부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한 것이다. 위대한 부자였다.

 구타모라가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고리산성 일대로 사료된다. 고리산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나온다.

 

문무대왕은 이미 영공(英公)과 함께 평양을 격파하고 돌아오며 남한주(南漢州)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襛王)이 고리산(古利山)에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침략하고자 꾀하고 있을 때 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 각간이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을 맞받아 공격하여 승기를 타고 그 왕 및 재상 4명과 군사들을 사로잡아 그 예기를 꺾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 서현은 양주총관(良州摠管)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변방의 백성들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편안히 하였고, 임금과 신하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나랏일에 골몰하는 근심이 없어졌던 것이다. 지금 유신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 사직의 신하가 되어 나아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재상이니 공적이 뛰어나다. 만약 공의 집안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직위와 상을 과연 어떻게 하여야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진실로 대왕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김유신 열전>

 

 그런데 초기의 기세와는 다르게 전쟁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신라는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신주와 삼년산군의 군대를 이동시킨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가 남부여를 어느 정도 타격해 주면 그 때 남하하여 남부여를 쉽게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아무래도 강한 자가 타격을 받는 것이 고구려 입장에서는 유리했던 것이다.

 

B. 신주(新州)의 군주인 김무력(金武力)이 주(州)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조>

 

 전세가 교착 상태에 이르자 성왕은 안달이 난 듯하다. <일본서기>의 표현은 태자 여창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군사 회의를 위해 비밀리에 성왕이 태자 여창이 주둔하고 있는 고리산성으로 달려간 듯하다. 그런데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기보병 50명으로 구천을 통해 고리산으로 향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구천은 옥천읍의 서쪽에서 금강으로 북류하는 소옥천(서화천)이다. 신라군은 성왕이 움직인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지금의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 ‘구진베루’에 매복한 듯하다. 매복한 군대는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이끄는 부대였다. <일본서기>에서는 도도를 ‘고도(苦都)’ 혹은 ‘곡지(谷智)’라 하였고, 출신지는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라고 쓰고 있다.

 

D. 그 아버지 明王은 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新羅는 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新羅에서 佐知村의 飼馬奴 苦都[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苦都는 천한 奴이고 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苦都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明王이 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묻었다. [다른 책에는 “新羅가 明王의 頭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이 明王의 뼈를 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조>

 

성왕 32년(554)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仇川)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조>

 

 신라는 말을 기르는 노(奴)인 도도에 의해 참수시킨 것도 모자라 성왕의 두개골을 신라 도당 북청 계단 아래에 묻고 신라 귀족들이 모두 밟고 지나가도록 하였다. 적국에게는 패악이지만 적국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려는 심리적인 효과는 만점이다.

 

C.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조>

 

E. 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新羅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 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餘昌이 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 [鞍橋는 우리 말로 矩羅膩라 한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조>

 

 성왕을 기습한 것은 삼년산군의 군대이지만, 고리산성에 있는 태자 여창의 군대를 배후에서 공격한 것은 신주의 김무력 군대였다. 사방이 포위된 여창의 남부여군은 무참히 학살된다. 까닭은 포위가 되어 식량이 떨어지자 어떤 식이든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하지만 산성을 내려 온 남부여 보병을 기다린 것은 신라의 기병들이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그 수를 과장하였다고 해도 당시 고대 사회 전투 중에서 3만 가까운 병력이 손실되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엄청난 패배였다. 이로서 남부여는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