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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보은 매곡성과 호점산성(1) : 신라가 금강 도하를 꿈꾸다

<2010년 10월 17일>

 

남부여의 일모산군(치소는 지금의 청원군 문의면 양성산성)에는 두개의 속현이 있는바, 두잉지현(치소는 지금의 연기군 남면 미호천 연안의 당산성)과 미곡현이다. 보은 매곡성은 바로 남부여 미곡현의 치소이다. 보은 매곡성은 지금의 보은군 회인면 소재지 회인천이 남쪽으로 굽어흐르는 동쪽에 솟은 해발 186.5m의 아미산 위에 축조되었다. 그래서 매곡성은 산이름을 따서 아미산성으로도 불린다. 신라가 남부여의 미곡현 치소를 정복한 후 현의 이름을 변경하여 매곡현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미곡성보다는 매곡성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표지사진 - 보은 매곡성 전경

 

남부여 미곡현은 금강의 조그마한 지류인 회인천(최초 이름은 웅암천) 일대의 변경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보은군 회인면과 회남면 일대이다. 당시 나제간의 국경은 한남금북정맥에서 분기한 금적지맥이었다. 금적지맥이 남으로 주행하며 동서로 나누었는데, 서쪽은 바로 남부여의 미곡현이고 동쪽은 신라의 삼년산군이었다. 즉 미곡현은 남부여 동부전선에 해당되어 중앙군이 상시 주둔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부여의 미곡현은 신라가 삼년산성 축조(470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군이 정복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비록 금적지맥의 산줄기가 나제를 가르고 있었지만 미곡현은 금강 북안으로 고립된 지역이다. 물론 남부여는 일모산군을 통해 미곡현을 지원하였을 것이지만, 금강(지금의 대청호) 남안 내지 서안에서 전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미곡현이 언제 신라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남쪽의 옥천 일대의 금강이 돌파 당한 후에는 이곳 미곡현도 신라군에게 정복된 것으로 이해된다.  470년 삼년산성 축조 후 10년 이내에 미곡현은 신라가 접수하였을 것으로 사료되며, 신라군은 금강 북안에 호점산성을 구축하며 장기전에 대비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호점산성은 회인천과 금강이 만나는 일대를 굽어보며 금강 남안에 구축한 남부여 방어선을 경계하는 동시에 이웃한 남부여의 일모산군으로 통하는 염티재 또한 감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호점산성의 초축 연대는 고려 말로 알려져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나제간의 대회전 당시인 480~500년 근간으로 추정된다.

 

 

 

 보은읍에서 수한면을 지나면 금적지맥상의 고개인 수리티재(321m)가 나온다. 수리티재 서쪽이 바로 남부여 미곡현이 있었던 회인면이다. 수리티재의 어원은 수레와 연관이 있다. 이는 수리티재가 과거 수레가 넘어갈 정도로 도로의 폭이 넓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대에도 수리티재는 한반도 중부지방을 남북으로 이어주는 간선도로였다.

 

 

회인면 이정표

 

 

 회인면 가는 길

 

 

 회인면 소재지 동쪽 아미산에 축조한 매곡성 전경. 아미산은 산이 미인의 아름다운 눈썹을 닮았다는 데서 연유한다.

 

 

 

 

 

 

 

 

 매곡성 바로 옆으로 청원~상주간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회인면 소재지에서 서북으로 25번 국도를 타고 팔봉지맥 상의 피반령을 넘어면 남부여 서원(혹은 비성 또는 자곡으로 지금의 청주)의 남쪽에 이른다. 그리고 동북으로 571번 지방도를 타고 한북금남정맥 상의 고개를 넘어면 낭성(지금의 청원군 낭성면과 미원면 일대)이 나온다. 신라가 낭성 일대를 복속시키면서 미곡현도 운명을 같이 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매곡산성 바로 아래로 흐르는 회인천. 회인천이 매곡성의 자연 해자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남쪽으로 회인천이 흐른다. 두루미가 비상하고 있다.

 

 

 매곡성 남벽. 작년 겨울 답사하였으나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산성의 흔적들이 있으나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매곡성을 일견하고 회인천 하류와 금강이 합강하는 지점에 있는 회인면 남쪽의 호점산성을 올랐다. 호점산성은 수풀이 가려 조망권이 좋지 않았다. 보은군은 삼년산성에 이어 호점산성도 정비하여 군의 관광 자원으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비용이 많이 드는 성곽 복원에 앞서 비용이 적게 드는 정상 부근의 잡목들을 제거하여 조망권을 확보할 수 있다면 지금 보다는 산성 답사자나 산행자가 많을 것이다. 필자가 늦은 시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등산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걸으니 기분은 최고였지만, 보은군의 원대한(?) 계획을 알고 산행하다보니 탁상행정의 현실이 바로 느껴졌다.

호점산성은 회인면 용곡리에 있다. 회인면에서 대전 방향의 571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가 용곡교 부근에서 호점산성 이정표가 보인다. 용곡교를 건너면 첫 마을이 용머리 마을이고 옛 회룡초등학교(지금은 한국보이스카웃 회룡야영장임) 좌측으로 돌아들어가면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 바로 옆에 산행 입구가 나온다. 호점산성은 주차장 못미처 성안골이라는 골짜기를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성안골을 따라 올라가면 동문터가 나온다.

필자가 늦은 시간에 산행한 것도 있지만 최초 성안골을 우례실 계곡으로 착각한 때문에 성안골과 동문터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산행을 끝내고 나니 그제서야 성안골이 어디인지 알았다. 재답사에는 이미 날이 어둡고...ㅠㅠ 

 

 

주차장

 

 

 호점산성 안내도

 

 

 안내문

 

 

 새로운 안내도

 

 

 산행 입구

 

 

 이정표 때문에 보이는 우례실 계곡을 성안골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우례실 마을 가는 길

 

 

 우례실 마을

 

 

 

 

 

 호점산성 이정표

 

 

 우례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좌측 돌탑

 

 

 우측 돌탑

 

 

 우례실 계곡 나가는 길

 

 

 이 계곡을 성안골로 착각하였다.

 

 

 이정표

 

 

 이정표 입구에서 농원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허나 이것도 착각! 할 수 없이 농원 뒤 산중턱을 올라 산성을 오르기로 하였다. 개고생은 했지만 한편으론 흥미진지했다.

 

 

 오르니 요상한 소나무가 반겨준다.

 

 

 

 

 

 드디어 성벽을 찾았다. 아! 위대한(?) 하늘도깨비의 오기. 시작은 엉터리이지만 끝은 해피하다.

 

 

 처음엔 이곳이 남벽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남벽치고는 성곽의 방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뭐 이래!  성 내부를 보고 산성을 쌓는 법도 있나? 사실은 북벽이다.

 

 

 석축한 돌이 특이하다

 

 

 토기조각인지 기와조각인지 구분이 안된다.

 

 

 

 

 

 북벽

 

 

 

 

 

 

 

 

 

 

 

 

 

 

 

 

 

 

 

 

 

 

 

 

 

 

 

 

 

 

 

 

 

 

 

 

 

 

 

 

 

 

 

 

 

 

 

 이정표를 새로 만들건지 글자가 희미하다.

 

 

 

 

 

 만마루재에서 올라오는 길. 만마루 이정표를 보고 그제서야 이곳이 산성의 서북벽임을 깨달았다.

 

 

 

 

 

 

 

 

 참으로 정성들여 잘 쌓아올린 성벽

 

 

 

 

 

 

 

 

 

 

 

 

 

 

 

 

 

 

 

 

 

 

 

 갈비봉 정상의 전망대

 

 

 가야할 길

 

 

 전망대라는 말이 무색하다. 수풀에 가려 조망권 확보가 어렵다. 정상만이라도 조망권이 확보되어야 산행하는 재미가 있지요. 보은군수님!

 

 

 전망대에는 12시 반에서 멈춘 고장난 시계가 걸려있다.

 

 

 

 

 

 호젓한 등산로

 

 

 우물터인지 건물터인지 구분이 안된다. 모양새는 꼭 우물터갔다.

 

 

 천연적인 성벽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산책길이자 성벽 위 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