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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보은 삼년산성(1) : 신라가 백두대간을 넘어 삼한통일의 교두보를 마련하다

<2011년 1월 16일>

 

표지사진 - 삼년산성 서벽 전경

 

 

매우 추운 겨울 오후였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라 다른 산성 답사는 미루고 산보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삼년산성을 향했다. 그런데 왠걸! 휑한 산성은 북풍을 그대로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숲속 산책길이라면 바람 정도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자비마립간 13년(470)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다.[삼년(三年)이라는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공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마립간 조>


이 기사는 당시 신라가 사벌주(지금의 경북 상주시 일대)에서 백두대간의 화령을 넘어 서북방으로 진출하였음을 알려준다. 삼년산성은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해발 325m의 오정산 정상에 축조한 산성이다. 여제(백제와 고구려)간에 벌어진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백제와 군사 동맹을 맺은 신라가 군사 원조로 출격했다가 돌아오는 중간에 이곳 백두대간 서쪽의 땅을 합병한 것으로 보인다. 즉 백제와 전쟁을 통해 확보한 것이 아니라 여제간의 전쟁 와중에 어부지리로 획득한 땅이라는 것이다. 당시 군사 공조 관계에 있던 나제간에는 명확한 국경은 없었다. 신라가 백두대간 동쪽으로 퇴각하지 않고 군대를 주둔시키자, 그제서야 백제는 경계를 획정한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과 가까운 보은군 삼승면에 소재한 초등학교에 나제간의 국경선을 표시한 비석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소지마립간 8년(486) 봄 정월에 이찬(伊湌) 실죽(實竹)을 장군(將軍)으로 삼았다. 일선계(一善界) 장정 3천 명을 징발해서 삼년(三年)과 굴산(屈山) 두 성을 고쳐 쌓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조>


480년을 전후하여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침입이 본격화되자 신라는 백두대간 서방의 여러 성들을 돌볼 틈이 없었다. 오히려 백제에게 군사 원조를 청할 판이었다. 이때 삼년산성 일대 지배권은 백제가 장악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의 공세가 약화되자 전격적으로 삼년산성 일대로 재진출한다. 그리고 일선계(지금의 경북 구미시 선산읍 일대) 주민을 동원해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개축하고 야심을 드러낸다.

소지마립간은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개축하므로써 삼한통일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 관산성 전쟁으로 알려진 백제와 가야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드러나듯 삼년산성과 굴산성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그리고 삼년산성에서 금북정맥을 넘어 금강 지류인 미호천과 남한강 지류인 달천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즉 여제 쌍방을 공격하고 방어할 수 있는 양수겸장의 산성이 바로 삼년산성이다. 삼년산성은 축조 이후 고구려나 백제에게 한번도 점령당하지 않고 오히려 교통의 결절지를 장악하고 삼한 전쟁을 주도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주차장 부근의 산성 안내도

 

안내문

 

오르는 길에 바라 본 산성 서벽(서문 우측)

 

서벽(서문 좌측)

 

보은 시내

 

 

 

서벽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성벽의 높이는 13~20m로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는 성벽은 그 이상으로 보인다. 성벽으로 기어 올라 내부로 진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서문(정문)

 

서문 좌측의 서벽

 

서문 좌측 부분

 

한컷 더!

 

서문 우측의 서벽

 

서문 우측 부분. 수문도 보인다.

 

서문 좌측의 성벽과 치

 

서문 우측 성벽과 치

 

서문에 들어오면 바로 아미지라는 연못이 있어 못을 둘러 돌아와야 한다. 가파른 서문을 올라와 서문 양쪽의 치에도 불구하고 성문이 뚫리더라도 연못이 해자 역할을 하며 궁수들이 도열해 서문으로 들어오는 적을 바로 제압할 수 있다. 삼년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는 바, 각 성문은 각기 다른 독특한 방어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삼년산성은 성곽 기술의 천재가 고안해 낸 한국 산성의 교과서로 불릴만하다.

 

산성 내부에서 바라 본 서문

 

서문 좌측으로 오르는 길

 

'아미지' 암각자. 김생의 글씨체로 알려져 있다. '아미지'는 미인의 눈썹 같이 아름다운 연못이라는 의미이다.

 

김생

 

711(성덕왕 10)~791(원성왕 7).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서도에 정진해 예서·행서·초서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안동 문필산(文筆山), 경주 경일봉(擎日峰) 석굴(石窟) 같은 곳에서 글씨를 힘써 공부하고, 충주 북진애(北津崖)에 있는 절에서 중이 되어 두타행(頭陀行)을 닦았다. 고려 사신 홍관(洪灌)이 송(宋)의 변경(汴京)에 체류할 때 김생의 글씨를 가져다 보이자 송의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왕희지(王羲之)에 비길 만한 천하의 명필이라고 격찬했다. 그뒤부터 중국 사신들은 김생의 필적을 매우 귀하게 여겨 얻어갔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문필산·김생굴(金生窟)·김생사(金生寺) 등 그와 관련된 풍수유적이 전한다. 그의 유일한 서첩으로〈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가 있으며,〈해동명적(海東名蹟)〉·〈대동서법(大東書法)>에도 몇 점의 글씨가 실려 있다. 이밖에도 〈백률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

 

 

 

서문에서 바라 본 아미지와 산성 내부 전경

 

 

 

서문에서 바라 본 외부 전경. 서문에는 치 말고는 외부 방어 시설이 별로 없다. 이는 가팔라서 이 성문을 뚫기는 어렵다는 반증이다. 다만 내부 방어시설로 아미지라는 해자를 설치하여 식수, 배수, 방어시설을 겸했다.

 

 

 

서문 좌측 오르는 길

 

좌측 산책길로 오르며 서문 우측 성벽을 바라보다. 서문 접근도 전에 치에서 신라군이 쏘는 화살에 고슴도치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남쪽으로 보이는 산은 삼승면 소재지 서북쪽에 있는 금적산(651.6m)이다.

 

 

 

 

 

 

 

산성 내부와 남벽 부근

 

남쪽으로 보이는 산이 삼승면 소재지 동쪽의 삼승산(574.4m)이다. 삼승면에는 나제간의 경계를 표지한 바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일대 나제간 주요 교통로는 백두대간 화령~보은 마로면~보은 삼승면~옥천 안내면~옥천읍에 이르는 루트가 제일 완만하다. 백제는 신라의 삼년산성에 대비하여 지금의 옥천군 안내면 일대에 방어성을 형성하고 삼승면 부근에 경계석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옥천군 안내면과 안남면 일대는 신라의 아동혜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백제가 설치한 아동혜현을 함락시키고 신라가 자국 영토화한 것으로 사료된다. 백제의 아동혜현이 무너지자 백제는 금강(지금의 대청호) 이서 지역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을 것이다.

 

금적산. 상주청원간 고속국로도 보인다.

 

서북치성 가는 길 (서문 좌측길)

 

삼승산 일대

 

좌측이 삼승산, 우측이 금적산.

 

 

 

보은읍 서쪽으로 금북정맥에서 분기하여 보정천의 북벽을 이루는 금적지맥이 남류하고 있다.

 

능선 끝자락이 금적지맥이다. 금적지맥은 금적산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금적산

 

서방의 보은 시내. 뒤 능선이 금적지맥의 능선. 능선을 넘어 서쪽에 이르면 금강 대청호 연안이다.

 

남방 좌측의 삼승산과 우측의 금적산.

 

좌측의 금적산과 우측의 금적지맥 능선.

 

서북치성 부근에서 북방을 바라보다. 들판 너머 사진 중앙이 노고산성으로 백제계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노고산성 우측 보정천 건너 봉우리에 문암산성(학림리산성)이 있다. 신라는 삼년산성에서 이 두 산성과 얼마간 대치하다가 주성산성(보은군 내북면 성티리)~낭성산성(청원군 미원면 성대리)~구녀산성(금북정맥 이티재 우측 봉우리)을 거쳐 금강 지류인 미호천 연안으로 나갔다. 한편 신라는 주성산성과 낭성산성 부근에서  남한강 지류인 달천 상류인 괴산군 청천면 일대로 진출하면서 고구려와 충돌하였다.  

 

 

 

사진에 보이는 들판에는 나제간의 혈전으로 숨진 군사들의 주검과 말들의 사체를 묻은 말무덤 즉 큰 무덤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북쪽의 보은읍 중동리 들판. 노고산성(합미산성 내지 한민산성으로도 불린다)이 보인다.

 

동쪽 속리산 가는 계곡

 

산성의 북벽. 끝에 북동치성이 보인다.

 

 

 

북방

 

북벽 중간에 북문이 있다. 북문 앞에는 두 개의 보조 석축을 쌓아 성문안으로 들어올 때, S자형 길목을 따라 들어와야 한다. 이 두 개의 보조 석축들은 이중 차단벽을 형성하며 옹성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북동치성 동쪽의 능선은 속리산 천왕봉(1057.7m)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한남금북정맥이다.

 

 

 

 

 

 

 

 

 

북벽 내부

 

북문

 

북문 우측의 북벽 내부

 

북문 밖 보조 석축에서 외부를 바라보다.

 

북벽 내부

 

 

 

되돌아본 북벽 내부와 중간의 북문. 정교하게 쌓아올린 산성이 이채롭다.

 

북동치성 가는 길

 

되돌아보니 서북치성이 보인다.

 

 

 

서북치성과 북벽 내부

 

북동치성

 

북동치성 부근의 석축 흔적들

 

북동치성 부근 산책로

 

북동치성 부근에서 북서방를 바라보다.

 

북동치성 부근에서 바라 본 동방. 능선은 한남금북정맥이며 아래 도로는 25번 국도로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산성을 거쳐 백두대간 화령 방면의 고대 신라 답달비군(지금의 상주시 화서면 일대)으로 향하는 길이다.

 

동북방의 한남금북정맥.

 

동남방은 보은군 마로면 가는 길이다. 이 일대 나제 교통로는 보은군 마로면에서 삼승면을 거쳐 옥천군 안내면 가는 길이다. 삼년산성은 이 나제 동서교통로 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보은군 마로면 일대가 백제군 손에 들어가면 고립될 위험이 상존한다. 그래서 마로면 관기리에 산성을 쌓아 삼년산성 배후를 튼튼히 한 것으로 사료된다.

 

~ 보은 삼년산성(2)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