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7일>
표지사진 - 핏재산성 정상에서 바라 본 서대산(904.1m)
오늘은 금산 일대 산성을 둘러보았다. 금산 일대는 관산성 전쟁(553년) 이전까지는 가야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금산의 서북쪽에 있는 대전은 남부여 영역이고, 금산의 동북쪽에 있는 옥천은 신라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관산성 전쟁은 삼국 국경의 충돌이었다.
관산성 전쟁 당시 남부여와 가야는 군사 동맹을 결성해 옥천까지 근접한 신라의 서진을 저지하였다. 하지만 관산성 전쟁의 결과 가야는 사실상 신라의 속국이 되어 금산을 비롯한 백두대간 서쪽의 가야 땅은 무주공산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관산성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남부여가 아닌 가야로 볼 수 있다. 남부여는 성왕이 전사한 셈이지만, 가야는 사실상 멸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야의 공백을 남부여와 신라가 각축을 벌이며 영역을 확장하였다. 백두대간 동쪽의 가야 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백두대간 서쪽의 가야 땅은 남부여가 접수하였다. 이로써 반도는 삼국만이 정립되었다.
<삼국사기>는 관산성 전쟁의 결과 재편된 삼국의 역사만을 기록하였다. 가야에 대한 역사는 고작 <일본서기>에 단편적으로 전할 뿐이다. <일본서기>도 백제와 왜의 입장에서만 서술하다보니 가야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이로써 가야의 역사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게 된 것이다. 관산성 전쟁 이전까지 가야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역사학자가 아닌 역사가의 몫이다. 가야사에 대한 진실된 모습이 그려질수록 우리 고대사는 풍부해질 것이다.
관산성 전쟁 이후 패닉 상태에 빠진 남부여는 사비 도성으로 향하는 길을 서둘러 봉쇄해야 했다. 다행인 것은 신라가 관산성 전쟁에 승리한 이후 더 이상 서진을 감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부분이 조금은 미스테리하다. 관산성 전쟁 이후 신라의 서진을 막는 서남진 루트(이 루트는 황등야산군의 영현인 진동현으로 향하는 루트이다) 상에 남부여는 1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그곳이 바로 금산읍의 북벽을 이루는 식장과 장용지맥에 쌓은 산성들이다. 오늘 답사할 산성들이다.
윗삽실 마을. 금산군 금성면 하신리 윗삽실 마을에서 금성산을 오를 수 있다.
상신저수지 향하는 임도
상신저수지
제법 운치있는 임도였다.
임도 좌측은 핏재산성이 있다. 핏재산성의 북벽 석축이 무너져 흘러 내린 돌들로 보인다.
돌아보니 아득히 서대산이 보인다.
임도 종점 부분
임도 종점 부분에서 오른쪽 계곡길로 올라갔다. 금성산을 쉽게 오르려면 좌측 밭을 지나 마수리가는 가는 고개길로 오르는 것이 좋다. 오른쪽 계곡 길 오르다 핏재산성쪽을 바라보았다.
금성산 동북 바로 아래 평탄지. 이곳까지 산성이 확장된 것은 아니고, 다만 지금의 초소같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능선은 금성산 부근에서 식장지맥과 분기한 장용지맥 상의 능선이다.
동쪽으로 닭이봉 부근이 조망된다. 닭이봉 부근에는 신라계 산성인 용문산성이 있어 금산 일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금성산 오르는 중간 지점에 촛대처럼 생긴 바위가 서 있다.
제법 가파른 된비알이다.
석축의 흔적인지... 확실치는 않다.
금성산성 동북벽 일대로 보이지만 성벽의 형태는 민묘로 인해 확실치 않았다.
민묘의 비석
금성산 정상
뒷능선이 대전의 남벽을 이루는 보문산(457.3m)으로 보이고, 보문산 앞 능선의 좌측이 안산(424m), 우측이 조선 태조대왕 태실이 있는 만인산(537.1m)이다. 앞 능선이 이곳 장용지맥과 분기한 식장지맥이다. 식장지맥과 장용지맥은 남부여 동부전선 상의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다. 이 두 지맥 상에는 무수히 많는 남부여계 산성들이 자리하고 있다.
동북방으로 서대산이 시원하게 열려 있다. 민둥산 뒤가 대암리 산성이고 그 좌측이 철마산 보루성이다. 철마산 보루성은 남부여계 산성이나, 대암리 산성은 고려시대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대암리산성은 용문산성과 더불어 신라의 산성으로 추정한다. 다만 신라의 토기편이나 와편이 발견되지 않아 고려의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금성산성 동남방 가까이 핏재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멀리 동쪽으로 영동의 천태산(714.7m)이 보인다. 핏재산성 직선에 보이는 봉우리가 닭이봉이다. 이 부근에 신라계 용문산성이 위치하고 있어 당시의 대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옥천 마성산성 남쪽 사목재와 장용지맥의 비들목재(서대산 남쪽 고개)를 넘어면 금산 군북면 소재지가 나온다. 용문산성은 군북면 소재지 동쪽의 닭이봉 부근에 위치하며 금산 일대에 포진한 남부여 산성들과 한동안 대치하고 있었다.
금성산 남쪽의 금산의 진산인 진악산(732.3m)
핏재산성. 핏재산성에서 동남방으로 이어가면 계원봉(352m)이 나온다. 사진에서는 핏재산성의 약간 우측 뒷봉우리이다. 계원봉에는 남부여계 보루성이 있다. 이곳에서는 대전진주간고속도로 인삼랜드휴게소가 보인다. 인삼랜드 휴게소 동쪽 봉우리가 닭이봉인데 이곳에 용문산성이 위치한다. 남부여는 계원봉 보루에서 용문산성의 신라군의 동태를 감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금산벌
산불감시초소 오르는 계단에서 계원봉 보루를 바라 보았다. 앞의 핏재산성 능선에서 약간 우측으로 향한 능선 끝이 계원봉 보루이다. 그리고 그 동쪽 맞은 편(핏재산성 봉우리와 직선상에 있는 봉우리)이 용문산성이다. 필자는 용문산성의 위치는 대략적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그 위치가 닭이봉 어디인지는 확실히 모른다. 재작년 대암리산성 답사 때 부근에 가 보았으나 능선을 잘못 드는 바람에 찾지 못했다.
마수리 가는 길. 핏재산성 가는 길이기도 하다.
서남방의 헬기장. 이곳까지 금성산성을 이루고 있다.
헬기장에서 바라 본 금산벌과 진악산. 아래 보이는 들판이 임진왜란 때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700명의 의병이 영동 양산 루트로 진격해 온 왜군과 맞서싸운 곳이다. 655년 영동 양산 일대에서 맞붙은 조천성 전투의 결과 남부여가 패배했다면 아마도 금산벌에서 비슷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당시 왜군은 호남으로 진격하기 위해 금남정맥 상의 두 고개인 웅치와 이치를 넘으려고 하였다. 대둔산 남쪽의 이치를 넘기 위해 금산으로 진격했다가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과 이곳 금산벌에서 부딪힌 것이다. 물론 신라의 진격로는 호남의 전주가 아닌 사비 도성이었지만 같은 맥락으로 금산벌로 진격하려고 했던 것이다.
참고사진
헬기장 전경
헬기장에서 내려와 금성산성 서남벽을 조망해 보았다.
이곳 주변에는 석축의 흔적이 완연해 이곳이 산성임을 알려주었다.
다시 서북벽을 산책로를 바라 본다.
헬기장에 서면 서남쪽으로 또 하나의 산성이 보인다. 나무들 사이로 안테나 서있는 봉우리가 만악리산성이다. 남부여는 이처럼 식장지맥과 장용지맥 분기하는 주변에 7개 정도의 산성을 구축하여 신라의 서진에 대항했던 것이다. 이처럼 좁은 지역에 산성의 밀집도가 높다는 것은 이곳이 사비도성으로 통하는 중요한 루트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금산벌과 진악산
산성 내부
산불감시초소
서대산
추부면 일대와 서대산. 금성산성 북쪽 추부면 마전리에도 산성이 있어 신라군의 서진에 대응하고 있었다. 금성산을 중심으로 남부여계 산성들이 7여개나 포진하고 있어 이곳이 관산성 전쟁 이후 남부여 최대의 동부전선임이 실감난다.
산성의 남쪽 마수리 일대
북쪽 전경. 좌측의 만인산에서 우측의 서대산까지의 전경.
남쪽 전경. 금산읍 일대와 진악산 전경.
금성산성을 대략 둘러본 것 같아 이제 핏재산성을 향해 출발한다.
금성산성의 동벽을 되돌아 보았다. 헬기장 근처의 석축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산성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금성산성과 핏재산성 중간 지점의 고개. 이 고개 이름이 핏재는 아니다. 마수리고개 내지 말머리재로 불린듯 한데 확실치는 않다.
이정표
마수리 가는 길. 마수리는 수리수리마수리 할때의 마수리가 아니고 '말머리'라는 뜻이다.
고개 부근의 참호
핏재산성 가는 산책로
되돌아본 금성산
드디어 핏재산성 초입이다.
석축의 흔적들
되돌아본 서북벽 부근
산성 내부의 평탄지
성벽 아래의 석축 흔적들
되돌아본 내부 평탄지. 금성산이 보인다.
계곡 아래로 성돌들이 흘러내려 너덜지대를 이루고 있다.
산성 내부 산책로
동북벽 부근은 자연 지형도 매우 가팔라 석축이 여지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 임도를 따라 오를 때 확인한 돌들도 비올 때 흘려내려온 것들이리라.
동남벽 부근의 장대지로 사료된다.
남쪽으로 금산읍내와 진악산이 보인다. 바로 아래 동네가 금성면 마수리.
한컷 더
핏재산성에서 바라 본 서대산 전경. 민둥산 우측으로 대암리산성과 좌측으로 철마산보루가 보인다.
동쪽으로 닭이봉이 보인다. 저 부근에 신라계 산성인 용문산성이 있다.
우측으로 서대산. 아래 동네가 금성면 하신리 윗삽실마을.
~ 금산 금성산성과 핏재산성(2)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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