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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조천성 전투 : 7C 중반 신라와 남부여간의 최대 화약고

<2011년 3월 1일>

 

표지사진 -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고분

 

 

655년 남부여와 고구려는 신라를 일시에 공격한다. 일종의 군사공조였다. 이때 신라는 33성이 함락되어 위기를 맞는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한다. 당나라는 화답하고 곧바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에 신라는 대 고구려 전선에서 평화를 찾고, 곧바로 남부여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한다. 그것이 바로 조천성 싸움이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조천성 전투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 열전에 그 단편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영휘(永徽) 6년(655) 태종대왕(太宗大王)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분하게 여겨 이를 치고자 도모하였다.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大監)으로 삼았다. 이에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에 도달하여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고, 나가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


태종대왕(太宗大王) 때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에 쳐들어오자, 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출전하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때에 도옥이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승려가 된 자는 ‘위로는 학술에 정진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다음은 도(道)의 쓰임을 일으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모습만 승려와 비슷할 뿐이고 한 가지 좋은 것도 취할 만한 것이 없다. 차라리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승복(法衣)을 벗어 던지고, 군복을 입고 이름을 고쳐 취도(驟徒)라고 하였다. 달려가서 보병(徒)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병부에 나아가서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였고,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적지에 나갔다. 깃발과 북소리의 진격 명령에 따라 창과 긴 칼을 가지고 돌진하여 힘껏 싸워 적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삼국사기 취도열전>


 <김흠운 열전>과 <취도열전>을 보면, 남부여와 고구려에게 33성을 빼앗기고 난 후 무열왕이 우선적으로 조천성을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대 남부여 전선 중에서 조천성 지역이 최대의 화약고임을 유추케 한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와 남부여 간의 최대 화약고인 조천성은 어디인가?


영동군(永同郡)은 본래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영현이 둘이다. 양산현(陽山縣)은 본래 조비천현(助比川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황간현(黃澗縣)은 본래 소라현(召羅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1 영동군 조>


 <삼국사기 잡지 지리 영동군 조>에 보면 길동군의 영현인 조비천현이 나온다. 조천성은 바로 조비천성의 약자이다. 약자의 한자도 같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에 이렇게 명확한 것도 드물다. 더욱이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에 보면, ‘백제 땅에 도달하여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고, 나가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고 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양산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걸로 보아 조천성이 조비천현의 치소임에는 분명하다. 양산은 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일대를 가리킨다.

 

 

필자는 심천면 핏골에 이어 당일 양산면 일대를 둘러 보았다.

 

2018년 9월 2일, 금강둘레길 안내판.

 

송호관광지 입구에 있는 이영순 시비

 

이영순(1922~1989)   충북 영동 양강 출생, 동경제대 경제학부 수학, 1947 서울신문에 전쟁소설 <육탄( 肉彈)>을 발표,   주요 시집으로는 다음과 같다. <연희고지(延禧高地)> 1951,  <지령(地靈)> 1952,  <제삼(第三)의 혼돈(渾沌)> 1958, <토양견본(土壤見本)> 1977, <왕도(王道)> 1977

구석봉 시비

 

 

 

양산 팔경 안내판. 영국사, 함벽정, 강선대, 여의정, 비봉산, 자풍서당, 봉황대, 용암

 

 

 

 

 

양산 송호리 송림

 

 

 

 

 

 

 

 

 

 

 

양산가 노래비

 

양산가 노래비를 세운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655년 조천성 전투에서 죽은 김흠운 장군을 기려 지은 노래가 양산가라고 한다. 김흠운은 나물이사금의 8대손으로 태종무열왕의 사위이자 신문왕의 장인이 된다. 그는 확실한 진골이었던 셈이다. 진골 출신이 조천성 전투의 부장으로 출전한 것을 보면, 신라 입장에서 조천성 전투가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래비의 양산가 원문.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편에 채록되어 있다.

 

양산가는 가사는 전하지 않고 유래만 <삼국사기> 열전(列傳) 제7 김흠운조(金歆運條)에 전하며 같은 내용이 축약되어 <증보문헌비고> 권106 악고(樂考)17에 실려 있다. 655년(태종 2)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자 신라는 백제를 치려고 했다. 낭당대감(郎幢大監) 김흠운이 백제의 양산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아 위험하게 되자 뒤따르던 자들이 몸을 피하도록 했으나, 김흠운은 피하지 않고 적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대감 예파(穢破), 소감 적득(狄得), 그리고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도 용감히 싸우다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애도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출처-브리태니커 인터넷판>

 

원문 번역문

 

도야지 같은 원수의 나라 / 나의 조국을 침노하나뇨 // 용맹스러운 화랑의 무리 / 나라위한 충정 어이 참으리 // 창을 메고 내집을 멀리 떠나와 / 풍찬노숙 싸움터로다 // 무찌르던 어느날 밤 놈들 칼날에 / 장하도다 나라위해 목숨 바쳤네 // 돌이켜 바라보니 양산의 구름 / 타오르는 불기둥 살벌하고나 // 오호라 슬프다 우리 대장부 / 북쪽 원수 칼날에 쓰러지다니 // 천추에 빛나는 호국의 영령 / 길이 길이 명복을 누리옵소서

 

이 노래는 전형적인 애국 가사이다. 당시 경주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비록 양산가의 가사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동국여지승람에 채록된 이 가사와 비슷하리라 사료된다. 이와는 달리 양산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구전 양산가가 전해지고 있다. 구전 가요로서 양산가는 노래비에 새겨진 가사 외에도 비슷한 3종의 가사가 더 있다.

 

양산가 (구전 가요)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세 / 난들 가서 배잡아 타고 /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세 (후렴구) //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 양산 창포장에 잉어가 논다 /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세 (후렴구) //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 양산 백사장에 자라가 논다 /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세 (후렴구) //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 장게가 논다 장게가 논다 / 양산 수풀속에 무구리 장게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세 (후렴구)

 

* 모링이 : 모퉁이의 경상도 사투리   * 난들 : 양산면 가선리 부근의 지명 * 창포장 : 양산면 송호리 앞에 창포가 많이 나는 밭이 있었다고 함   * 장게 : 수꿩인 장끼   * 무구리 : 오래된, 묵은

 

구전되는 양산가는 이 구전 가요는 단순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다. 왜 양산을 가자는 걸까? 양산 창포장에는 잉어가 있고, 양강 백사장에는 자라가 있고, 양산 숲속에는 장게가 있다는 내용이다. 그 만큼 양산벌에는 물산이 풍부하다는 것이리라! 이것이 신라와 남부여가 이곳 양산벌을 두고 한치도 양보하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양강(금강의 다른 이름)의 송림

 

 

 

양산 팔경의 하나인 여의정

 

 

 

 

 

여의정 전경

 

 

 

송호리 송림에서 바라 본 양강의 상류 방향

 

좌측의 동골산(494m)과 우측의 봉화산(387m)

 

 

 

 

 

양산팔경 중 하나인 용암과 그 뒤의 강선대

 

 

 

 

 

강선대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던 용이 그대로 떨어져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용암과 강선대. 

 

 

 

 

 

철새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것을 필자가 방해한 모양이다.

 

'엘 콘도르 파샤(El condor pasa), 철새가 떠나고 나면'의 가사가 떠오른다. 그런데 콘도르는 큰 독수리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철새라고 번역하였다.

 

용암

 

이곳이 78년 영화 '소나기' 촬영장소라고 한다.

 

소나기 원래 배경은 경기도 양평 북한강 자락이다. 소나기를 금강에서 찍었구나!

 

 

 

 

 

강선대

 

송호 관광지를 나와 가곡리 고분 가는 길에 바라 본 비봉산. 조천성이 있던 곳이다.

 

동남쪽으로 학산면 가는 길이다. 두번째 능선 좌측이 대왕산이다. 신라군은 조천성을 회복하기 위해 이곳 대왕산에 산성을 쌓고 주둔하며 기회를 노린 것으로 이해된다. 대왕산은 무열왕이 직접 친정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앞 능선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남부여 간에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것으로 사료된다.

 

 

 

뒤쪽의 대왕산 능선. 대왕선 앞(서편)으로 학산면 일대에서 발원한 원당천이 흐른다.

 

동쪽의 양산벌. 심천면 가는 길이다. 관산성 전쟁 당시 가야군은 이곳 양산을 거쳐 심천면 핏골 일대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관산성 전쟁 이후 양산과 금산의 일부는 신라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대전과 금산 일대의 남부여군과 대치하는 형국이 655년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거의 100년 가까이 이 일대가 국경 지역으로 있다가 남부여의 선제 공격으로 이곳이 최대 화약고로 변하게 된 것이다. 대왕산 능선의 끝자락이 외마포 삼거리이다. 외마포 삼거리는 심천과 양강 가는 분기점이다. 둘 다 영동읍으로 해서 황간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갈 수 있다. 양강면을 통해 나가는 것이 신라로 가는 빠른 길이다. 심천은 신라가 길동군의 치소인 지금의 영동읍에서 옥천 관산성을 거쳐 대전 방향으로 갈 때 요긴한 길이다.

 

대왕산 능선

 

 

서북방의 양산벌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고분. 김흠운 장군의 묘인가?

 

 

 

조천성 전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비봉산과 고분

 

 

 

 

 

이곳에서도 대왕산이 보인다.

 

심천 가는 길

 

가곡리 고분 전경. 양산면 면 소재지 바로 옆에 있다. 

 

주차장에서 바라 본 비봉산. 비봉산은 양산으로 불린 듯하다.

 

양산에서 학산가는 505번 지방도에서 바라 본 비봉산 전경

 

학산면 가는 방향. 좌측 능선이 대왕산.

 

동북방의 양산벌. 심천면 가는 방향이다.

 

학산면 박계리 모산마을 입구에서 바라 본 비봉산 전경

 

모산마을 입구에서 대왕산(뒷능선)을 바라 보다. 505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학산면이 나온다. 비봉산과 대왕산 사이인 이 일대에서 격렬한 조천성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학산면 박계리 박계사거리 주변에서 바라 본 대왕산 전경. 학산면 일대에서 발원한 원당천이 흐른다. 원당천은 북류하며 금강에 합류한다.

 

박계사거리 주변 교통 표지판

 

비봉산이 살짝 보인다. 비봉산과 대왕산 사이에는 조그마한 구릉이 금강까지 주행한다. 이 능선을 사이에 두고 조천성 전투는 피아간에 물고 물리는 접전이 벌어졌다.

 

학산면 가는 협곡

 

대왕산. 사실 산성 답사를 못했기에 추정할 뿐이다. 대왕산 능선은 제법 길어 어떻게 산성을 축조하였는 지 필자도 매우 궁금하다.

 

대왕산 능선. 이 길을 따라 가면 양산면 원당리가 나온다.

 

박계사거리에서 학산면 지내리 지내삼거리로 왔다.

 

지내삼거리에서 바라 본 갈기산. 이곳 북편 산록에도 산성이 있어 '양산 덜개기'라는 협곡을 감시하고 방어하고 있다. 양산 덜개기는 양산과 금산을 잇는 협곡으로 이곳만 방어하면 남부여나 신라 양자 모두 침입하기 힘들다.

 

 

 양산 덜개기

 

 금강은 장수 수분리 신무산 아래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무주와 금산에 이르러서는 적벽강으로 불린다. 그러다가 덜개기를 지나 영동 양산에 이르러서는 양강으로 불렀다. 대청호를 지나 청원과 연기에서는 부용화가 만발하였다 하여 부강으로 부르다가, 남부여의 고도 부여에서는 백강(백마강)이 되었다.

 655년 조천성 전투는 금강 중에서 양강 일대에서 벌어진 불퇴전이었다. 피아간에 물러날 수 없는 혈전이었을 것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한 ‘양산덜개기’는 금강의 최대 협곡이다. 금강 양안의 협소한 길은 겨우 수레만 다닐 수 있었다. 말이 조금만 요동쳐도 그대로 협곡 아래로 떨어진 판이다. 이곳이 바로 남부여와 신라의 고대 교통로였다. 553년 관산성 전쟁 이후로 신라는 양산덜개기를 지나 가야 땅인 금산 일대에 진주하였다. 그리고 남부여와 대치하다 655년 양산덜개기 지나 조천성까지 빼앗기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금산 의병이 전술적 요충인 '양산 덜개기'를 버리고 금산벌에서 항전하였으나 패배한 오류가 있었다. 물론 물적으로 부족한 의병이 금산전투에서 패배하리라는 대세를 바꾸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산 덜개기’에서 전투를 치렀다면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산의 전투가 증명하듯 남부여는 '양산 덜개기' 이서 지역에 요새처럼 산성을 쌓아놓고 신라군에 대비하였다. 신라군 또한 '양산 덜개기' 이동 지역에 산성들을 포진시키고 남부여군에 대비하고 있었다.

 

박계사거리 가는 길

 

지내삼거리에서 바라 본 비봉산

 

지내삼거리에서 501번 지방도를 타고 북쪽 금강 유역으로 가다 보면 비봉산과 갈기산 사이에 모리라는 동네가 나온다.

 

 

 

 

 

모리 마을에서 바라 본 갈기산

 

갈기산 북편 산자락. 갈기산 북록에 양산덜개기를 감시하고 방어하는 산성이 있다.

 

갈기산 맞은 편에는 비봉산이 있다. 비봉산 북록에는 신라 길동군의 영현인 조비천현의 치소인 조천성이 있었다.

 

비봉산과 갈기산 사이로 501번 지방도가 나 있다. 금강 변으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