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7일>
~ 금산 금성산성과 핏재산성(1)에서 계속 ~
표지사진 - 금산군 금성면 두곡리 들판에서 바라 본 좌측의 만악리산성과 우측의 금성산성
하산길
원점 회귀. 임도 끝나는 부분의 밭. 필자는 보이는 사진의 계곡 우측으로 올라갔다. 금성산을 쉽게 오르려면 밭을 지나 금성산성과 핏재산성 중간 고개로 오르는 길이 좋다.
동쪽으로 서대산과 대암리산성이 보인다. 뒷능선 맨 우측이 용문산성이 있는 닭이봉 부근.
아직도 고드름이 달려있다.
핏재산성에서 흘러내린 성돌들.
상신저수지
대전에서 금산가는 37번 국도 제방 넘어 닭이봉이 보인다.
시간이 남아 금산 칠백의총을 둘러보기로 마음 먹었다.
안내도
안내문
의총문
기념관
중봉전집
왜란시 금산지역 전투도. 삼국시대와 1592년 임진왜란 및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도 교통로 상황은 비슷하였을 것이다. 반도를 침략한 왜군은 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일대에서 '양산덜개기'를 지나 금산벌로 들어왔다. 첫 전투는 봉황천이 금강에 합류하는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와 천내리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를 '개티전투'라 한다. 삼국시대에도 지금의 영동 양산면으로 비정되는 조천성 전투(655년)가 전개되었다. 이때도 금산 일대에는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개티전투가 벌어졌던 이 일대에는 삼국시대의 산성이 즐비하다. 즉 신라군의 도하를 막으려고 남부여는 이 일대에 천내리산성, 저곡리산성 그리고 후방 사령부 역할을 한 수당리 토성이 이것들이다. 만약 이 산성들이 무너지면 신라군은 왜군처럼 금산벌로 진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장용지맥과 식장지맥을 넘어 진동현(금산군 진산면)을 거쳐 남부여 황등야산군(논산시 연산면 일대의 황산벌)으로 지향했을 것이다. 오늘 답사한 금성산성, 핏재산성과 만악리산성 등은 금산벌을 거쳐 사비 도성을 향하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들이다. 당시 신라는 관산성 전쟁 이후에는 옥천에서 그리고 남부여 멸망이 가까워지는 7C 중반에는 영동 방면에서 남부여를 침공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이 호남의 전주를 장악하려고 대둔산 남쪽의 배티재를 넘어려고 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는 사비 도성을 지향하였기에 험준한 배티재 보다는 진동현 지나 논산시 벌곡면 한삼천리에서 황령재를 넘어 황산벌로 지향하려고 했을 것이다.
대둔산 남쪽의 배티재와 진안 부귀면의 곰티재는 금강 서쪽에서 전주로 가는 주요 고개이다. 배티재는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이며, 곰티재는 호남정맥 상에 위치한다. 당시 왜군은 동시에 이 두 고개를 넘고자 하였다. 1592년 개티전투에 승리하고 금산벌을 접수한 왜군은 군을 분리하고 7.7과 7.8일 거의 비숫한 날짜에 서진하였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금산벌에 주둔하면서 기회를 모색하였다. 눈벌전투, 연곤평전투, 횡당촌 전투가 이때 벌어진 전투였다. 연곤평전투에서는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700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만다. 이같은 조선군의 결사항전의 태도에 기가 눌린 왜군은 조용히 금산군 부리면 현내리의 지삼티 고개를 넘어 무주를 거쳐 김천으로 물러나게 된다.
항의신편.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조헌의 행적과 업적을 수록한 책.
조헌 선생 영정
국방강화 상소도
근왕 창의도
토적 맹약도
전략 회의도
청주성 탈환도
금산혈전 출진도
금산혈전 순절도
화살통(보물 제1007호). 조헌 선생이 직접 사용했다고 한다.
세독충정. 금산 눈벌전투에서 순국한 고경명 선생의 좌우명이라 한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상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
순의비
순의비는 1940년 금산경찰서장인 이시가와 미찌오에 의해 폭파된다. 이를 다시 복원하여 현재의 비각에 보존하고 있다.
종용사
제너럴 박이 심었다는 금송. 박통은 아산 현충사에도 이와 비슷한 금송을 심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 금송이 문제란다. 금송은 일본이 원산지인 나무라고 한다. 일본풍의 금송을 왜적과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의 현충시설에 이렇게 심어 놓았으니... 아산 현충사의 금송을 없앤다고 시민들이 소송을 제기한 모양이다.
칠백의총
중봉선생 일군 순의비
금산의 진산 진악산이 칠백의총을 한결같이 바라보고 있다. 진악산 보석사에는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과자가 없어 미안... 잉어들도 길들어져 있는 모양이다. 인생도 잉어와 다를 바 없네. 사랑도 정도 출세도 명예도 이렇게 길들여져 가는 건 아니겠지... 불현듯 일어나는 소회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시 한번 되뇌인다. 산성 답사의 끝은 어디일까? 역사의 종국은 어디 쯤에... 왜 하늘도깨비는 우리의 고대사를 부여잡고 있는 걸까? 집착인 것인가? 망상인 것인가?
돌아오는 길에 금성산성 서남방의 만악리산성을 조망하려고 금성면 두곡리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금성면 파초리 들판에서 바라 본 금성산성과 핏재산성
좌측의 만악리산성과 우측의 금성산성
뒤돌아 남족을 바라보면 진악산이 보인다.
다시 차를 세우고 바라 본 금성산성과 핏재산성.
두곡리 들판에서 바라 본 만악리산성과 3번 군도가 지나는 큰고개. 3번 군도는 금산군 금성면 두곡리와 과 복수면 용진리를 잇는 도로이다. 고개 이름에서 유추해 본 결과 고대 루트는 이곳 두곡리를 지나 지금의 진산면인 남부여 진동현으로 갔을 것 같다. 큰고개 지나 진산면 소재지를 가려면 진산면 만악리 초남산성과 복수면 곡남리 산성을 거쳐야 한다. 산성을 연결하는 루트가 고대루트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는 금성면 소재지에서 진산면 소재지 가는 68번 지방도가 많이 이용된다. 그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가 소리니재인데, 고대에는 이 고개가 부 도로로 사용되었을 것 같다.
두곡리 들판에서 바라 본 금성산성과 핏재산성.
좌측부터 만악리산성, 큰고개, 우측의 금성산성
금성산성과 핏재산성
만악리산성
고성의 역사를 지닌 성아래 마을
금성면 두곡리 성밑(아래) 마을과 만악리산성. 두곡리산성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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