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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남원 귀정사 : 남부여 대왕이 모산성 전투를 독려하며 머물다

<2011년 4월 16일>

 

블로그 관리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보니 보관함의 자료들이 너무 많아졌다. 다시 숙제를 좀 해야겠다.

 

 관산성 전쟁(554년)의 여파로 대가야가 망하자(562년), 남부여와 신라는 무주공산이 된 가야의 땅을 경쟁적으로 따먹기 시작한다. 신라는 서진하고 남부여는 동진하여 드디어 운봉고원의 모산성에서 격렬한 전투가 발발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최초의 모산성 전투는 무왕 3년(602년)으로 나온다. 운봉고원의 서북쪽은 백두대간으로 모산성은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다. (남원 모산성 답사기 참조)

 모산성 전투의 발발은 남부여가 관산성 전쟁에서 성왕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침묵을 깨고 신라에 대한 공세에 돌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내문에는 무녕왕이 귀정사에 3일간 머물다 돌아간 것으로 나와 있지만, 무녕왕 대는 귀정사의 전신인 만행사를 창건한 듯하고, 실제 귀정사에 머문 대왕은 무왕일 가능성이 높다. 무왕이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고 절에 행차한 것이 아니라 모산성 전투에 참전한 군사들을 독려하고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왕이 독려한 전투는 남부여 군의 참패로 귀결된다. 물론 이후 남부여군의 대규모 공세는 모산성 점령하고 백두대간을 넘어 속함성(함양), 대야성(합천), 독산성(낙동간 서안)까지 진출한다. 이러한 공세에 놀란 신라는 김유신으로 압량주 군주로 삼아 가까스로 남부여군의 파죽지세를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신라는 선덕여왕이 죽고 태종무열왕이 집권하자 당나라와 제휴하는데, 그 단초는 모산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모산성을 상실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산성 서쪽 요천 상류 골짜기에 귀정사가 위치한다. 이 한적한 골짜기 사찰에 남부여 대왕이 행차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훗날 모산성을 점령하고는 대왕이 머물며 정사(실제는 모산성 전투를 독려하고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정사)를 논하다 돌아간 곳이라 하여 만행사를 귀정사로 고쳐 부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귀정사 보광전

 

돌아갈 귀, 정사 정. 필자의 눈에는 귀정이란 말이 계속 모산성 전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이는 것인가? 필자의 눈에는 천황봉도 심상치 않게 보인다. 귀정사 뒷산의 천황봉도 남부여 대왕이 행차한 곳이라 천황봉으로 부른 것처럼 들린다.

 

 

 

 

 

관음전

 

 

 

 

 

 

 

 

 

 

 

 

 

백두대간. 저 너머가 운봉고원과 아영분지이다. 보이는 대간은 모산성과 시루봉산성인 듯하나 확실치는 않다. 귀정사는 한적하여 너무도 좋았다. 귀정사는 천황봉 줄기가 가로막혀 고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서쪽 고개를 넘어면 바로 거사물현의 치소가 나와 모산성 전투에서 남부여군이 패하더라도 피신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