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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가야 폴리스 기행

다라국 : 황강 하류 유역의 가야 폴리스

<2011년 3월 13일>

 

표지사진 - 황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합천 청덕면 적포 부근

 

 

 창녕 비사벌국의 유적 답사를 마치고 다라국의 유적이 있는 합천 쌍책면 합천박물관으로 향했다. 비사벌국은 낙동강 동안의 가야 폴리스이며, 다라국은 낙동강 서안의 가야 폴리스로 거의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척해 있었다. 4세기가 끝나갈 무렵 대 가야 공세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당시 신라는 남고구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신라의 지배 집단은 고구려 군단 세력이 주축이었으며, 고구려의 지원 아래 동해안을 따라 지금의 경주분지까지 내려와 서라벌을 점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외부 세력에 위협을 느낀 가야는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400년 경에 신라는 고구려에게 군사 요청을 하였고 광개토왕은 4만에 이르는 대군단을 파견하였다. 이른바 광개토왕의 남벌이었다. 남벌의 결과 가야 폴리스의 중심지인 낙동강 하류의 본가야가 거의 쑥대밭이 되고 만다. 본가야의 지배집단은 열도로 이주하거나 낙동강 서안의 지류인 남강 하류 유역의 안라국과 황강 하류 유역의 다라국으로 이동하였다. 한때 다라국이 번창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라국의 북벽은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수도지맥이다. 수도지맥을 넘어면 대가야의 도성이 있었던 경북 고령이 나온다. 대가야는 본래 본가야와 더불어 가야의 양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벌로 본가야가 심대한 타격을 입자 본가야 유민을 받아들이며 가야를 대표하는 세력이 되었다. 대가야라는 명칭은 통합 가야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가야의 통합은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완전 통합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안라국처럼 고구려나 신라에 동조하는 세력을 완전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가야가 반도에서 사라진 주된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창녕에서 합천을 가려면 낙동강을 건너야 한다. 그 유일한 다리가 적포교이다. 물론 북쪽으로 율지교가 하나 있긴 하지만 그 다리는 고령으로 들어가므로 합천읍을 가는 데에는 적포교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창녕과 합천은 매우 가깝지만 이처럼 낙동강이라는 자연 경계로 말미암아 다른 가야 폴리스가 번창했던 것이다. 물론 비사벌국과 다라국은 우호적이며 대가야의 영도 아래 대 신라에 대한 군사 공조를 같이하였다. 사진은 창녕군 유어면 미구리 미구제방에서 바라 본 낙동강이다. 정면에 보이는 산 봉우리에는 합천 앙진리산성이 있다.

 

미구제방에서 바라 본 창녕 성산리산성. 성산리 산성 남쪽 아래로 우포늪을 거쳐온 토평천이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곳이 창녕 비사벌국으로 향하는 수로의 관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산리 산성을 거쳐 북쪽으로 조금가면 적포교가 나온다. 창녕과 합천을 잇는 국도는 24번 국도이다. 국도 상의 다리 부근이 대부분 고대의 나루터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적포교, 앙진리산성, 성산리산성이 있는 이 부근이 다라국과 비사벌국의 주요 교통로로 보면 될 것 같다.

 

미구제방에서 바라 본 낙동강 하류

 

적포교 지나서 바라 본 낙동강 동안의 성산리산성. 성산리산성 부근에 나루터가 있어 낙동강을 도하하여 다라국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수로라면 황강을 거슬러 다라국에 도달했을 것이다.

 

적포리산성 전경. 덕유산에 발원한 황강의 거친 물살이 태고적부터 이 적포 부근의 암벽을 때렸을 것이다. 다라국은 이곳 암벽 산정에 산성을 쌓아 황강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황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 건너편이 낙동강 동안이다.

 

황강 상류. 다라국 가는 길이다.

 

좌측의 말정교

 

말정교 부근에서 바라 본 서남쪽의 성산산성. 합천군 청덕면 소재지 남쪽에 있다.

 

말정교 중간 지점에서 바라 본 황강과 낙동강 합수지점

 

황강 상류 방향으로 다라국 가는 길이다.

 

말정교 지나 황강 북안을 거슬러 황강 상류 방향으로 올라오면 합천군 쌍책면 다라리가 나온다.

 

다라리는 다라국의 지명이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라국의 궁성으로 추정되는 다라리토성.

 

다라리토성 우측으로 합천박물관과 옥전고분군이 있는 산 구릉이 보인다.

 

남쪽으로 황강 너머 옥두봉(253m)이 보인다.

 

다라리 서북방 들판

 

합천박물관의 상징 환두대도 조각물

 

다라국 궁성으로 사료되는 다라리(성산) 토성 모형

 

 

 

다라국 관련 문헌자료. <양직공도>와 <일본서기>에만 다라국이 나온다.

 

원통모양그릇받침

 

원통모양그릇받침과 짧은 목항아리

 

 

 

다라국의 형성은 광개토왕의 남정과 관련이 있다.

 

옥전고분의 대표 고분인 M3호분

 

M3호분에 배치된 유물을 재현해 놓았다.

 

환두대도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환두대도. 특히 옥전고분군에서는 7자루의 용봉문 환두대도가 발견되어 눈길을 끈다.

 

낙동강 하류의 본가야가 신라의 간섭 아래 놓이면서 낙동강 서안의 가야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신라의 서진을 방어하였다. 이를 학계에서는 후기가야라고 부른다.

 

다라국은 백제의 성왕이 주도한 두차례의 임나복권회의(541년과 544년)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 듯하다. 임나복권회의의 결과 553년 관산성 전쟁에서 가야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의 서진에 맞선 것으로 이해된다. 

 

옥전 67-B호분 비늘갑옷 출토 모습 사진

 

옥전M1호분 로만글라스 출토 모습 사진

 

철은 땀과 불과 바람의 화음이 빚어낸 작품이다.

 

 

 

말머리가리개. 가야에는 이러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기병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말갑옷. 말까지 갑옷을 입은 중장기병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

 

말에 장식하여 깃발을 달았던 철제로 사료된다.

 

투구와 판갑옷

 

출자형 금관(모형)

 

 

 

관모

 

 

 

로만글라스. 다라국의 대외 교류는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는 지도 모르겠다.

 

투구

 

매우 아름다운 유리구슬. 직접 보면 당시 장인들의 솜씨가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금제귀걸이. 화려한 듯하면서도 은은함을 더해 매우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후기 : 이날 오전에 창녕 목마산성,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 답사로 지친 나머지 합천박물관 뒤쪽의 옥전고분군 산책이 내키지가 않았다. 지금와서보니 후회가 된다. 합천박물관은 다음에 한번 더 가도 좋을 만큼 값진 유물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인연있는 분들도 만났으니...


<2018년 1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