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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제천 사열이성(1) : 고구려 국원성의 동쪽을 방어하라

<2011년 6월 19일>

 

 

표지사진 - 남한강 동안에서 바라 본 제천 사열이성 전경과 그 아래 충주호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청풍나루

 

 

 어제 적성을 보고 제천시 청풍면 충주호 부근에서 1박을 하였다.

 

 <삼국유사 잡지 지리지>를 보면 지금의 제천시로 비정되는 고구려 나토군에는 영현이 둘이 있다. 하나는 지금의 단양인 적산현인바, 그 치소는 바로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에 소재한 적성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제천시 청풍면 일대인 사열이현인바, 그 치소는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에 소재한 사열이성이다. 오늘은 사열이현의 치소로 비정되는 사열이성을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필자는 사열이성이라 부르지만 이 성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이름은 달리 있다. 바로 제천 망월산성이 그것이다. 망월산성이라는 이름은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망월산성이라고 기록한데서 유래한다. 망월산은 사열이성의 남쪽에 위치한 336m의 봉우리로 사열이성 인근에 소재한 관계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편찬자들이 편의상 망월산성으로 지칭한 것이다. 이는 무지의 소치로 이 지역의 역사적 근원을 조금만 더듬어 보았어도 이런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지는 반복되어 왔다. 실제로 망월산 정상에는 석성이 없음에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편찬자들의 무지에서 유포한 망월산성이라는 표기에 현혹되어 아무런 고증없이 망월산 산정에 산성의 위치를 표시해 온 것이다. <문화유적총람>이나 <한국의 성곽과 봉수>에는 망월산 정상에 산성이 있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를 시정하는데 노력한 사람이 바로 향토 사학자인 유금렬씨이다.

 유금렬씨는 2004년 3월  제천시 수산면 상천리 가은산 남쪽 기슭 남한강 동북안 일대에서 새롭게 토성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인근에는 가은암산성도 있어 이 일대가 고구려 군사 요새가 즐비한 지역임을 실감케 한다. 참고로 단양군 적성면 성곡리에 소재한 가은암산성에 대해서는 <단양 신라 적성비>를 발견한 정영호 선생이 1980년 6월에 답사하고 이에 대한 소고를 기록한 바 있다.

 유금렬씨는 <백제의 가혜성>이라는 글에서 가은산 일대에서 새롭게 발견한 토성을 가혜성으로 추론하였다. 그리고 사열이성을 정약용과 신채호의 견해를 수용하여 백제의 성열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열이산성을 성열성으로 부르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를 보자.

 

[김]유신이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다가 [선덕여왕] 13년(644) 소판이 되었다. 가을 9월 왕이 명하여 [김유신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성을 치게 하여 크게 이겼다. 그로 인하여 가혜에 진(津)을 열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

 

 동일한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나온다.

 

선덕왕 13년(644) 가을 9월에 왕이 유신(庾信)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크게 이기고 일곱 성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644년 가을 상장군 김유신이 공취한 성열성이 과연 사열이성일까? 이를 추론하려면 당시 나제간의 화약고가 어딘지를 알아야 한다.

 

의자왕 2년(642년) 8월 장군 윤충(尹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品釋)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선덕왕 11년(642) 유신(庾信)을 압량주(押粱州)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백제 의자왕은 장수와 남원의 백두대간을 넘어 642년 무렵 지금의 낙동강 서안 지역인 합천의 대야성까지 함락시킨다. 이에 신라는 경주의 턱밑까지 다가온 백제군이 두려워 신라 전쟁의 영웅 김유신을 지금의 경북 경산시 일대인 압량주 군주로 임명하고 백제군의 낙동강 도하를 방어하였다. 즉 당시 나제의 최대 화약고는 낙동강 중류 유역인 셈이다. 이곳에서 나제간에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로부터 2년 후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상장군으로 삼아 낙동강 서안의 백제군을 몰아낼 것을 명한다.

 

[김]유신이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다가 [선덕여왕] 13년(644) 소판이 되었다. 가을 9월 왕이 명하여 [김유신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성을 치게 하여 크게 이겼다. 그로 인하여 가혜에 진(津)을 열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

 

 가혜성이나 성열성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나 김유신이 공취한 7성은 대체로 압량주(경북 경산시)와 대야성(경남 합천군) 사이의 백제가 장악한 성들로 추론된다. 당시 백제가 낙동강 도하 직전이나 도하 후 경주의 턱밑에서 대결을 이루던 시절에 김유신이 백두대간 죽령을 넘어 남한강 중류 유역인 단양과 제천 일대를 공격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더욱이 이 일대는 6C 중엽 진흥왕 대에 이미 고구려로부터 10군을 빼앗은 지역이고, 6C 말엽 고구려 온달 장군이 죽령과 계립령 이서 지역을 공략하다가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구려라면 몰라도 백제가 이 일대를 장악하고 신라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정황과는 맞지 않는다. 신라는 진흥왕 대에 이 일대를 점령하고 이후 고구려의 온달 장군에게 일시적으로 빼앗긴 적은 있을 지 몰라도 백제에게 이곳을 허용한 적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의 성열성을 사열이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필자는 향토 사학자 유금렬씨의 노력과 공로를 인정하지만, 제천과 단양 일대의 역사가 제대로 규명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유금렬씨의 <백제의 가혜성과 성열성> 논고를 비판적으로 살펴 보았다.

 그래서 이론의 여지가 많은 '성열성' 보다는 고구려 축성의 기원을 가진 '사열이성'으로 명명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토성 주변에서 충주호 너머 대덕산(567m)을 바라 보았다. 대덕산에도 산성이 있다고 한다.

 

남한강 동안에서 바라 본 제천 사열이성 전경과 그 아래 충주호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청풍나루. 사열이성 우측 산은 비봉산(531m)이다.

 

충주호. 정면 서쪽이 남한강 하류이다.

 

사열이성과 비봉산

 

좌측의 망월산과 우측의 사열이성

 

비봉산과 충주호. 우측이 대덕산 줄기이다.

 

 

 

사열이성 서남쪽 국제하키장 주차장 부근에서 북쪽의 대덕산을 바라보다.

 

국제하키장 주차장에서 사열이성 남쪽의 망월산을 바라보다.

 

국제하키장 주차장에서 사열이성 서벽을 바라보다.

 

사열이성 북쪽 아래에서 좌측의 대덕산과 우측의 성내리토성을 바라보다.

 

성내리토성. 뒤 능선이 성내리 토성으로 사료된다.

 

 

사열이성으로 들어가려면 청풍문화재단지 입구에서 표를 사서 들어가야 한다. 산성 답사하면서 돈 내기는 처음인 것 같다.

 

 

안내도

 

청풍문화재단지는 1985년 충주호 완공시 수몰된 이 지역 문화재를 모아 놓은 곳이다.

 

청풍문화재단지 입구. 실제 청풍 팔영루를 이전 조성해 놓았다.

 

청풍 팔영루 안내판

 

도화리 고가 전경

 

도화리 고가 안내판

 

황석리 고가 안내판

 

황석리 고가

 

 

 

 

 

 

 

 

 

 

 

 

 

 

 

 

 

황석리 고가 출입문

 

황석리 고가를 나오면 신 청풍대교가 보인다.

 

제천유물전시관 입구

 

원랑선사탑비 모형

 

 

 

유물전시관 옆으로 사열이성 정자가 보인다.

 

좌측의 대덕산과 우측의 성내리토성

 

충주호 동안

 

 

 

 

 

 

 

 

 

 

 

 

 

 

 

 

 

금동여래좌상

 

 

 

청동사리함

 

납석제불보살병립상

 

거울에 비친 납석제불보살병립상 후면의 산경도

 

 

 

 

 

수몰전 제천시 청풍면 일대. 정면이 대덕산이며 우측이 당시의 남한강이다.

 

 

 

 

 

유물전시관을 나와 북쪽의 충주호를 바라보다.

 

충주호 동안의 작성산과 동산 일대

 

유물전시관 뒤쪽의 수몰전시관

 

 

 

한벽루 모형

 

 

 

 

 

팔영루 모형

 

 

 

 

 

청풍향교 모형

 

 

 

 

 

수몰전시관을 나와 충주호 동안을 바라보다

 

동북방의 성내리토성 부근

 

동남방의 금수산 부근. 납석제불보살병립상 후면의 산경도를 보는 듯하다.

 

 

 

망월산

 

비석군

 

 

 

 

 

하늘의 별자리로 보이는 성혈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석물

 

 

 

 

 

 

 

 

 

 

 

 

 

청풍 한벽루

 

 

 

청풍문화재단지 동남방의 금수산과 가은산 일대. 신 청풍대교 공사가 한창이다. 충주호 건너편 정면 제일 낮은 산정에 저성이 있다. 사열이성 중심으로 사방이 산성이다. 사열이성 주변의 산성들로 추정컨대 이 일대는 551년경 신라가 백두대간 죽령을 넘고 적성을 점령한 후 고구려군이 한동안 이 일대에서 신라와 각축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사열이현이 무너지면 바로 고구려 남부지역의 부도인 국원경(지금의 충주)이 위태롭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방어전을 펼쳤을 것이다.

 

사진에 보이는 신 청풍대교 뒷산에 저성이 있다.

 

충주호(남한강) 동안 작성산과 동산

 

사열이성 북방으로 대덕산성과 성내리토성이 있다. 좀더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성내리 토성의 규모가 크다면 사열이성은 성내리 토성일 가능성도 있다.

 

북동방의 성내리 토성에서부터 신 청풍대교 지나 남동방의 금수산 일대를 파노로마로 찍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