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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핏골전쟁(2) : <삼국사기>가 외면한 가야의 전쟁

<2011년 7월 16일>

 

 554년 관산성 전쟁 당시 남부여와 가야군은 신라가 장악한 관산성(옥천읍 일대) 후방을 치기 위해 갑자기 영동군 심천 각계리 핏골을 장악해 버렸다. 핏골 부근은 관산성에서 신라의 전방 사령부인 금돌성에 이르는 요충지였다. 이를 남부여와 가야군이 장악해버리자 신라는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금돌성(지금의 영동군 황간면과 상주시 모동면 경계에 있는 산성)에서 대부대가 출전하였다. 하지만 좁은 계곡을 빠져나와 금강을 도하해야 하는 신라로서는 남부여와 가야의 군대를 상대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그래서 일단의 군단을 다시 파견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삼년산성(보은읍 일대)이다. 그런데 삼년산성에서 출발한 신라 군단은 핏골 부근의 남부여와 가야군을 치기 위하여 전혀 다른 루트로 진군하였다. 오늘은 이 루트를 따라 가 보았다.

 신라군은 삼년산성에서 마로산성을 거쳐 지금의 옥천군 청성면 저점산성(당시의 굴산성)에서 최단거리로 핏골로 향한 것이다. 핏골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굴산성(저점산성)이 있는 충북 옥천군 청성면 보정천 일대

 

보정천 내에 섬이 있고 섬 위에 누각이 있어 이채롭다.

 

 

 

여기저기서 소나기 구름인 적난운이 피어나고 있었다.

 

 

 

 

 

 

 

사진 좌측 끝 뒷산이 바로 금돌성이 있던 황간 백화산이다.

 

 

 

보정천 상류 방향. 보정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로산성을 지나고 보은읍에 있는 삼년산성이 나온다. 삼년산성의 신라군은 아마도 보정천을 따라 이곳 굴산성이 있는 옥천 청성면까지 왔을 것이다.

 

보은읍으로 향하는 고개. 신라군은 보정천을 따라 남하하든지 아니면 저 고개를 넘어 청성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저 고개 좌측이 굴산성(저점산성)이다.

 

굴산성은 평지성과 산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군이 침공하면 굴산의 주민들은 불리하면 삼년산성에서 부근에서 구원군이 올 때까지 산성에서 농성전을 전개했을 것이다. 보이는 언덕은 굴산성의 평지성이다.

 

 

 

신라군은 굴산성에서 출발하여 궁재로 올라와 핏골로 향했다. 궁재에서 바라 본 보정천 변의 굴산성(평지성과 그 좌측의 산성)

 

 

 

 

 

 

 

궁재를 넘어 다시 심천면 북쪽의 당재를 넘어야 한다.  궁재에서 이곳 당재까지 올려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험한 고개길의 연속이다. 심천 핏골에 주둔한 남부여와 가야군은 아마도 신라군이 궁재와 당재를 넘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신라 장군의 이름은 불명확하지만 뛰어난 전술가임에는 틀림없다. 알프스를 넘은 하니발에는 비견할 수 없겠지만 대체로 적이 상상하지 못하는 진격로를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본다.

 

 

 

당재. 통신탑이 보이는 정상에 당재산성이 있어 혹 있을 신라군의 역습에 대비한 흔적은 남아 있다. 신라군은 기습을 통해 당재산성의 남부여나 가야군을 제거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당재를 넘어 심천면 일대를 장악하고 핏골 부근으로 남부여나 가야군을 토끼몰이하듯 포위하고 금돌성에서 진격한 신라군과 더불어 학살이 자행되었을 것이다.

 

 

 

 

 

 

 

신라가 험로를 택하지 않았다면 관산성 전쟁의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성왕은 구진벼루에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