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8일>
표지사진 - 단양 적성의 북동벽 부근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은 지금의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고성에서 온달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고 있었다. 이때 고성 내에서 상단이 파손된 높이 93cm의 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고성의 이름이 밝혀졌다. 바로 적성이다.
적성비의 전체 글자 수는 430자 내외로 추정되며, 현재 남아 있는 글자 수는 288자이지만 주변의 발굴을 통하여 수습된 비편 21자를 합하면 현재 알 수 있는 확실한 글자는 309자에 달한다.
고구려 성에서 신라의 비를 발견한 것은 의외의 성과였다. 바로 신라가 고구려 적성을 함락시킨 시기가 대체로 밝혀진 것이다. 적성비의 제1행에는 연호(年號)나 간지(干支)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상단부가 파손되었으므로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
진흥왕 12년(551)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서 10개의 군(郡)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 신미(辛未)에 왕이 거칠부 및 대각찬(大角湌) 구진(仇珍), 각찬(角湌) 비태(比台), 잡찬(迊湌)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波珍湌)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湌) 비차부(比次夫), 아찬(阿湌)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거칠부 등은 승리를 틈타서 죽령 이외,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기사를 보면 신라는 진흥왕 12년(551)에 남한강 유역의 고구려 10군을 공취한 일이 있다. 이때 적성도 빼앗았을 것으로 보고 적성비의 건립 연대를 551년 이후로 본다. 더욱이 이사부·비차부·무력·도설 등의 신라 인명으로 보아 『단양 적성비』에 나오는 왕은 진흥왕이 분명해졌다.
적성비는 왕명을 받아 출정한 이사부(伊史夫)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장군이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赤城)을 공략하고 난 후 그들을 도와 공을 세웠던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尒次)와 그와 일정한 관계에 있던 인물들을 포상하고 이를 증명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적성 지방민들을 위무할 목적에서 세운 비로 추정된다.
적성은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원주, 춘천 방향) 뒷산이므로 찾아가기는 무척 쉽다.
문경에서 예천을 지나 예천군 감천면에서 931번 지방도를 타고 백두대간 죽령 남쪽 고을인 영주시 풍기읍으로 향했다. 그 도중에 세금 내는 부자 소나무로 알려진 천연기념물 294호인 석송령을 보기 위해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석송령은 자기 명의로 약 2000평 정도의 땅을 가진 부자 소나무이다.
신비감 마저 준다. 영험있는 소나무란 뜻에서 석송령으로 불린다.
힛듯재에서 바라 본 영주시 풍기 고을 모습. <삼국사기 잡지 지리 조>를 보면 영주시 일대는 원래 백제의 나이군이라고 한다. 그런데 파사이사금이 이를 빼앗았다고 한다. 여주 파사성에 이은 파사이사금의 남행 흔적인 것인가? 영주시 일대는 최초 백제의 지경이다가 파사 이사금이 남행하면서 백제로부터 탈취하고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남하하자 고구려 경내로 들어간 것으로 해석된다. 백두대간 죽령 이남 고을인 나이군 즉 영주시 일대는 고대 대회전의 각축장이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신라는 진흥왕 대에 이르러 낙동강 상류 지역을 장악하고 드디어 백두대간 죽령을 넘어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을 도모한다. 필자는 중앙고속도로 풍기 IC로 들어가 단양휴게소(상행선 원주 춘천 방향)에 도착하여 적성을 답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백두대간 죽령 터널을 지나자마자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단양휴게소에 주차를 하고 휴게소 오른쪽으로 난 문으로 나오자 적성의 동북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를 맞으며 적성을 오른다.
적성의 서남방으로 근거리에 소이산 봉수대가 보인다. 적성에서는 서남방의 남한강 하류(충주호 방향)가 보이지 않아 소이산 봉수대가 서쪽의 고구려군을 감시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신라 입장에서는 적성과 소이산 봉수대는 방어와 공격의 한 세트라고 할 수 있다. 유람선이 운행하는 지금의 장회나루 맞은 편 산이 가은산 능선인데, 고구려는 적성을 빼앗기고 이 일대에 산성을 구축하였다. 가은산 일대의 산성과 보루에서 고구려군은 동쪽의 적성을 호시탐탐 바라보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남벽
남벽
서남쪽의 소이산 봉수대
남쪽 아래의 단양 휴게소와 멀리 동남방으로 백두대간 죽령 부근이 보인다.
적성 내부로 올라가는 계단 길
동북방
산성 내부
안내판
남쪽으로 백두대간을 조망하다.
나무 뒤쪽 위에 유명한 적성비가 있다.
적성비 비각이 보인다.
안내판1
안내판2
단양 신라 적성비
정면
측면
후면
측면
정면의 비문
단양 신라 적성비는 우리 역사 공동체의 국보이다.
적성비 앞에서 남방을 조망하다. 신라군은 저 남족 길을 따라 551년 백두대간 죽령을 넘어 이곳 적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을 것이다.
적성비 뒤쪽 산책로로 올라 산성 내부를 둘러보았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석양의 적성과 남한강을 감상하려고 늦은 시간을 잡았는데 비가 올 줄이야! 하늘도깨비 감도 이젠 점점 쇠락해 가는구나!
산성의 서벽 산책로
서벽 열린 틈으로 바라보다.
돌아본 서벽 산책로. 지금 하늘도깨비 몰골을 보면 아마도 비맞은 생쥐꼴일 것이다. ㅋㅋㅋ
지나온 서남벽 부근이 장대지였을 곳으로 사료된다. 역시 여름의 산성 답사는 산성의 진면목을 보기에는 수풀이 너무 덮여 있다. 서북벽으로 내려가는 계단길.
되돌아본 서벽 장대지. 적성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으로 아마도 서쪽의 고구려군 경계에 소흘함이 없었을 것이다.
북동벽 가는 길
북동벽
앞 능선 아래로 남한강 건너 중앙고속도로 단양터널 입구가 보인다. 서쪽 좌측 능선의 제일봉이 제비봉(720m)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측 능선은 남쪽으로 흐른 금수산(1015.8m) 능선이다. 고구려군은 제비봉 서쪽 능선에 가은산성과 보루을 쌓아 지금의 충주인 중원경의 동방을 방어하였다.
적성 북동벽 모퉁이 일대를 감상하다.
북문
동남벽
서쪽의 제비봉
남한강 건너 능선
북문과 북동벽 곡선
북문 근처에서 남한강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산성 북동벽 모퉁이에서 남쪽을 조망하다.
서벽 부근의 장대지로 추정되는 산성의 제일 높은 곳.
산성 내부에서 북문을 감상하다.
북벽
북문으로 나와 북벽을 감상하다.
산성의 서쪽 내부 전경
서쪽 제비봉 일대
동남벽으로 가는 곡선
단양 휴게소와 남쪽의 두악산(723m)
아! 적성의 북벽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동북방의 남한강 상류. 지금의 단양읍 가는 방향.
서벽 부근의 장대지로 추정되는 산성의 제일 높은 곳.
산성의 남벽 구간
산성의 북벽 구간
빗줄기가 굵어지고 남한강에서 피어나는 물안개가 하늘로 올라 서쪽의 제비봉이 아스라히 사라지고 있다.
산성의 남벽 산책로
산성의 서벽 장대지 높은 곳.
북문
점점 멀어지는 북문
북벽과 남벽을 잇는 동벽의 곡선감이 느껴진다.
천상의 화원인 듯한 남벽 부근의 평탄지
남동벽 부근
멀어지는 남동벽
남벽 산책로
휴게소와 두악산
적성비 아래 원점회귀
'역사추론 > 대회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철 사열이성(2) : 고구려 국원성의 동쪽을 방어하라 (0) | 2011.06.27 |
---|---|
제천 사열이성(1) : 고구려 국원성의 동쪽을 방어하라 (0) | 2011.06.22 |
남원 귀정사 : 남부여 대왕이 모산성 전투를 독려하며 머물다 (0) | 2011.04.17 |
금산 금성산성과 핏재산성(2) : 남부여가 관산성 전쟁 이후를 대비하다 (0) | 2011.03.30 |
금산 금성산성과 핏재산성(1) : 남부여가 관산성 전쟁 이후를 대비하다 (0) | 2011.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