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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대회전

제철 사열이성(2) : 고구려 국원성의 동쪽을 방어하라

<2011년 6월 19일>

 

~ 제천 사열이성(1)에서 계속 ~

 

 

표지사진 - 충주호 북안의 대덕산성과 성내리토성 전경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남한강 서안 일대는 고구려의 국원성이 있던 곳이다. 이를 지표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중원고구려비, 장미산성, 봉황리마애불상이 있다. 국원성이란 고구려 제2의 수도를 지칭한다. 고구려 입장에서 반도 남부 통치 거점으로 국원성을 건설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진흥왕이 평정하고 국원에 신라의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8년(557) 조>와 <삼국사기 잡지 지리 조>는 전하고 있다. 신라는 역으로 반도 북부를 경영할 거점으로 국원에다 작은 수도 즉 제2의 수도를 건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국원성은 신라에 의해 언제 함락되었을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2년(551) 조>에는 신라 장군 거칠부가 고구려로부터 10군을 공취한 기사가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조>에는 진흥왕 12년(551) 거칠부가 8장군과 함께 '죽령 이외' '고현 이내' 10군을 공취한 것으로 나온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죽령은 지금의 백두대간 상의 죽령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현은 어디일까? 어려운 문제이지만 필자는 고구려의 평원군인 지금의 원주 이남의 치악재로 추론한다. 물론 당시의 전황에 따라서는 원주와 횡성 이북의 고구려 벌력천현이 있었던 지금의 홍천읍 이남의 삼마치나 작은 삼마치로 비정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간단하다.

 당시 고대 반도 중부의 남북루트는 대체로 두 길이 있었다. 하나는 죽령 루트이며, 하나는 계립령 루트이다. 죽령 루트는 고구려 남북루트이며, 계립령 루트는 신라가 고구려의 공세를 극복하고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개척한 루트이다. 물론 계립령 루트도 실제는 고구려 남북루트였지만, 신라가 지금의 상주인 사벌주를 장악하고 문경을 통해 하늘재와 계립령을 넘어며 고구려의 헛점을 노리면서 양동작전을 펼친 루트라는 의미에서 신라 남북루트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리고 신라는 삼한통일 이후 반도의 중심루트로 죽령보다는 계립령을 발전시켰다.

 진흥왕 당시 고구려는 죽령 루트를 통해 신라를 압박하였는데, 지금도 중앙고속도로와 5번 국도는 치악재와 죽령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즉 최단거리라는 것이다. 결국 당시 수레가 넘나들던 죽령 루트의 축은 지금의 치악재 말고는 달리 찾을 길이 없다. 이 때문에 필자는 치악재를 고현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령 이외'는 죽령의 남쪽을, '고현 이내'는 고현의 남쪽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입장에서 죽령 이남은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이외'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론한다. 따라서 이외와 이내는 죽령과 고현의 방위 개념이라기 보다는 고구려의 영향력 유무로 붙여 쓴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궁구해 볼 문제이다.  

 대체로 551년 진흥왕이 백두대간 죽령을 넘어 단양 적성을 점령한 후 공취한 죽령 이외 고현 이내의 10군은 남한강 중류 일대이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고구려 국원성까지 함락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헌상으로 국원성이 최종 함락된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8년(557) 조> 기사이다. 신라가 국원에 소경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국원성이 함락된 상한은 551년이며, 하한은 557년인 셈이다. 필자는 진흥왕이 설치한 10정의 지명으로 유추컨대 554년 이전에 이미 국원성은 신라가 점령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판단컨대 신라가 비록 백두대간 죽령을 넘어 단양 적성을 점령했다고 치더라도 고구려의 부도인 국원성이 곧바로 함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간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을 것이다. 그 유력한 장소가 바로 단양 적성과 대치하고 있던 사열이성과 그 주변의 가은산성 등일 것이다. 이곳이 바로 고구려 국원성의 동쪽 방어성이기 때문이다.

 

 

남쪽의 청풍문화재단지에서 바라 본 사열이성 전경

 

성내리토성

 

청풍현의 관아 금병헌

 

 

 

동쪽의 한벽루

 

안내문

 

 

 

금병헌 우측의 아궁이

 

사열이성을 망월산성으로 표기해 놓았다.

 

사열이성 가는 길

 

이정표

 

심장 품은 소나무란다.

 

 

 

 

 

 

 

 

 

사랑나무 연리지

 

 

 

연리지에서 바라 본 동남방의 신 청풍대교. 멀리 금수산과 가은산이 보인다.

 

충주호 동안의 작성산과 동산의 능선

 

연리지 한컷 더

 

 

 

사열이성 남벽

 

 

 

남쪽으로 망월산이 보인다.

 

사열이성 동남방으로 신 청풍대교와 저성이 보인다.

 

 

 

동산과 작성산 줄기. 동산과 작성산에도 산성이 있다고 한다.

 

 

 

하늘을 떠 받친 손 모양의 소나무

 

사열이성 남문 틈으로 망월산이 보인다.

 

 

 

 

 

안내문. 망월산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남쪽의 백두대간이 아스라히 보인다. 월악산 방향이다.

 

서남방. 아래가 국제하키경기장이다.

 

 

 

팔각정

 

충주호 동안의 작성산과 동산

 

 

 

 

 

팔각정 아래 바위에서 하늘에다가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팔각정에서 주변을 조망하다.

 

서방의 비봉산

 

북방의 대덕산

 

남방의 망월산

 

동남방의 금수산과 그 능선

 

 

 

동방의 동산과 작성산

 

동북방의 성내리토성

 

대덕산

 

 

 

 

 

서북방의 충주호(남한강) 하류 방향

 

서남방

 

 

 

남쪽의 월악산 방향. 월악산 남방의 백두대간이 신라가 중요시한 계립령 루트이다.

 

 

 

 

 

정오가 되자 호수에서 분수가 올라온다.

 

 

 

 

 

 

 

 

 

 

 

사열이성의 남서벽 가는 길

 

남서벽 가는 산책로. 산성을 주회하는 것은 포기하였다.

 

 

 

 

 

사열이성은 둘레가 500m 내외로 현의 치소로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대부분의 치소가 평지에 가까운 해발 100m 이하에 위치한 것을 감안하면 동북방의 성내리 토성이 평상시의 치소로, 이곳 사열이성은 비상시의  치소로 사료된다.

 

 

 

 

 

 

 

 

 

성을 내려오기 전 주변을 한번 더 둘러보다.

 

월악산 방향

 

 

 

 

 

 

 

 

 

 

금남루

 

 

 

석조여래입상

 

 

 

 

 

 

 

산수유나무와 열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