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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삼국 도성 기행

서라벌(1) : 북방 기마종족 유맹의 종착지

<2011년 12월 14일>

 

 

표지사진 - 경주 남산과 고분들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는 박석김의 복합 왕조로 천년 가까이 번성한 나라이다. 초기는 미약했다. 서라벌이라는 조그만 분지에서 출발하여 진한의 사로국을 거쳐 신라라는 고대국가로 진화한다. 한반도 동남쪽 궁벽한 모퉁이에 치우친 서라벌이 어떻게 신라로 성장하여 삼한 통일까지 이룰 수 있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지금의 눈으로 경주를 바라보면 조그만 지방도시일 뿐이다. 그런데 당당히 신라의 도성으로 선택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천년 왕조의 칭호까지 누렸을까?

 이 비밀은 서라벌의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서라벌은 고대 대륙으로 열린 공간이다. 말로 만주에서 두만강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면 며칠 만에 경주까지 올 수 있을까?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일이면 경주까지 올 수 있다. 요즘 경상도를 비하하는 말로 흉노의 후예라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매우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적석목곽분이라는 고분 양식으로 말하면 단순히 흉노의 후예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흉노는 기마민족이다. 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말로 서라벌까지 오는 데는 20일이면 족하다고 한다. 경주 고분에 중앙아시아의 이색적인 유물들이 풍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해안을 통해 한반도 남해까지 들어온다고 하자. 서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안선이 복잡하다. 배가 아니면 도저히 오기 힘든 지형 구조다. 반면 동해안은 융기 해안으로 비교적 단조롭다. 말을 타고도 얼마든지 남해안까지 쉽게 내려올 수 있다. 배는 향해의 위험이 존재하나, 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서라벌은 동해안의 분지치고는 매우 넓은 곳이다.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길이 막혀 형상강 상류로 따라 들어가면 바로 서라벌이 나온다. 많은 종족들이 서라벌에 들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에는 만주에서 한반도 남부지방까지 들어오는 안전하고 가장 빠른 길은 바로 동해안 루트이다. 여기에 서라벌이 신라로 진화한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서라벌은 대륙으로 열린 공간이었다. 이러한 점이 서라벌을 가장 선진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혁신하지 않으면 동해안 루트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다른 종족들의 침탈을 피하기 어렵다. 변하지 않으면 곧 복속의 운명에 노정된 곳이 서라벌이다.

 이 때문에 서라벌에서는 이종간의 혼혈이 일어나 가장 우수한 종족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이민의 물결이 잦다보니 역시 개방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화랑세기> 같은 책을 읽어보면 지금의 성관념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유습들이 존재한다. 당시 서라벌은 직계 이외 사촌부터는 스스럼없이 연예가 가능했다. 서라벌은 왕족 이하 성에 관한한 계급이 없는 사회였다. 노예도 여왕과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선덕여왕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골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골품은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 타협의 산물이므로 그 전통을 깨기는 어려웠다. 신라는 다부다처제 사회였던 것이다. 다만 법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특히 왕족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왕족에게는 골품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유교사관에 의해 서술된 역사서이다. 그들의 눈에 신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사회였다. 그래서 사촌인 왕과 왕비의 성을 바꾼다. 왕비의 성은 박씨로 많이 바꾸어 놓았다. <화랑세기>는 이를 여과없이 서술한 반면, <삼국사기>는 의도적인 윤색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이러한 개방적인 풍조가 당시 서라벌의 모습이었다.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라면, 다른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대모사상의 유제가 남아 있어 대모의 아들만이 성골이 되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삼국사기>는 부계 중심의 혈통으로 윤색하였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 당시 서라벌 사회가 열린 공간이라는 관념으로 보면 <화랑세기>는 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일본서기>도 <화랑세기>처럼 개방적인 성관념이 보인다. 이는 경주에서 동해를 건너 서라벌인들이 이즈모를 정복하고 야마토를 복속시켰다는 반증이다. 일본 초기 천황들은 바로 가야의 일원이던 서라벌에서 넘어간 사람들의 계보에 다름아니다.

 서라벌이 한반도로 들어오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동해안 루트 상의 비교적 넓은 분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결과 당시 가장 선진적인 폴리스였다는 점을 이해하고 호젓한 경주 시내를 걸어보면 고분과 유물들이 심상치 않게 보일 것이다.

 

  미명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경주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노서리고분군이다.

 

 

 

금관총이다. 발굴 후 복원하지 않아 평지가 되었다.

 

 

 

서봉총, 역시 발굴 후 복원하지 않았다. 1925년 일제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스웨덴 황태자 아돌프 구스타프 6세가 신혼여행 차 일본에 들리자, 그를 초빙하여 서봉총 발굴에 들어간다. 신혼여행 기념 발굴이라? 대왕의 안식처는 어디에?

 

 

 

 

서리가 내려 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쌍상총

 

 

 

호우총, 역시 평지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 호우가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신라는 남고구려 신세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구려 군사들이 서라벌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말끔한 호우총. 노서리고분군을 둘러보면 일제의 문화재 침탈을 실감할 수 있다.

 

 

 

 

 

 

 

노동리고분군의 봉황대. 고분이다.

 

 

 

봉황대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과거에는 봉황대에 올라 경주 시내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봉황대

 

 

 

노동리 고분군을 지나면 길 건너편에 황남리고분군(대능원)이 나온다. 지금은 다른 유적으로 분류해 놓았지만 고대에는 대능원과 같이 평원에 세운 거대한 신라 왕족들의 집단 묘역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도입되어 화장이 보편화되면서 다행히 규모가 더 커지지는 않았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들이 살 공간이 없어지면 좀~

 

 

 

대능원 입구 후문

 

대능원 입구에 들어서면 황남대총이 보인다.

 

 

 

황남대총의 규모에 놀란다.

 

황남대총은 적석목곽분이다. 중앙아시아에 산재해 있는 흉노의 고분들도 적석목곽분이다. 적어도 신라는 고고학적으로 흉노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중앙아시아 초원길의 동쪽 끝자락이 바로 서라벌이 있던 경주분지이다. 흉노 일파는 말을 타고 만주를 거쳐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경주분지까지 도달해 서라벌을 종복한 것이 분명하다. 그 주인공이 바로 황남대총에 묻힌 사람일 것이다.

 

 

 

 

 

미추왕릉 안내문.

 

미추왕릉 정문

 

미추왕릉. 미추왕은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다. 미추왕은 신비스러운 왕이다. 황금보검의 주인이라고도 한다. 그가 바로 흉노를 이끌고 서라벌까지 들어온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이곳이 미추왕릉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제사의 유습 덕분이다. 관례가 적어도 천여년 넘게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대능원의 이 고분만이 주인이 명확할 수 있을까? 

 

 

 

다시 황남대총으로 나왔다. 황남대총사적기.

 

천마도가 나온 천마총.

 

천마총 사적기.

 

 

 

천마총 입구.

 

천마총에서 바라본 황남대총

 

천마도(모사품)

 

천마총 내부 모습(모형)

 

 

 

 

 

대능원을 나와 첨성대로 향했다. 대능원 정문에 있는 신라왕경도.

 

 

 

대능원 조감도

 

첨성대 가는 길에 바라 본 고분과 경주 남산. 한폭의 그림 속을 걷는 듯하다.

 

 

 

 

 

 

 

경주 서편 산맥. 우측 가까운 산이 태종무열왕능이 있는 선도산(380.9m)이다. 선도산성이 있다. 우측 멀리 부산성이 있는 오봉산과 좌측으로 벽도산이 보인다.

 

남쪽의 남산.

 

북방의 소금강산 줄기.

 

 

 

경주 동부사적지대 안내문

 

경주 반월성. 신라의 도성.

 

서쪽으로 벽도산과 그 뒤로 단석산이 보인다.

 

남산과 건물지

 

첨성대

 

 

 

 

 

동쪽으로 토함산 자락이 보인다.

 

건물지. 이 건물지는 왕성인 반월성과 가까이 있는 곳으로 보아 관청의 건물로 보인다. 서쪽으로 우측 가까운 곳이 선도산이며, 중간 멀리 부산성이 있는 오봉산, 좌측이 벽도산이다.

 

 

서북방으로 선도산, 옥녀봉, 구미산 줄기가 보인다.

 

북녁의 소금강산 줄기. 이차돈의 목을 잘랐을 때, 목이 금강산으로 날라 갔다고 한다. 이때 금강산은 강원도 금강산이 아니라 경주 북천 건너 소금강산을 말한다.

 

반월성 가는 길에 북쪽을 바라보니 첨성대가 보인다. 

반월성

 

계림. 반월성 북쪽 아래에 계림이 있다.

 

신라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김알지의 탄생지가 바로 계림이다.

 

비각

 

계림의 숲은 신비한 기운이 느껴진다.

 

찬기파랑가.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찬양한 시이다.

 

일연현창(?)향가비

 

반월성 북문터. 신라는 왕성을 둘러싼 외성이 없다. 개방적인 신라의 모습인가? 아니면 자신감의 발로인가? 삼국 정립 이후 신라 도성이 파괴된 적은 없다. 물론 사로국 시절에는 왜나 낙랑에 의해 도성이 직접 피탈된 적은 있다. 그 때는 진한 소국 시절이며, 신라 김씨가 들어와 신라라는 고대국가로 진화된 이래로 서라벌은 어떠한 외침도 받지 않았다. 신라는 국경이 혼란스러울 때는 왕이 반월성에서 나와 명활산성으로 들어가 통치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자비마립간이다.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켰을 때(475년), 자비마립간은 백제에게 구원군을 파견하고 스스로는 반월성에서 나와 명활산성으로 들어갔다. 혹 있을 고구려군의 기습을 대비한 것이다. 국사 시험에 자주 나오는 고구려나 백제는 도성이 내외성의 이중구조이나, 신라는 외성 대신 산성만 있었다는 말이 이것이다.

 

반월성 내부 평탄지.

 

반월성 내부는 고즈넉하다.

 

반월성 남쪽의 남천

 

반월성에서 남천으로 나왔다. 반월성 남벽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남천 위 반월성 남벽. 고대에는 더욱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최근 남천에서 반월성으로 들어가는 월정교가 발견되어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월정교가 반월성의 정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초기에는 북문이 정문이었을 것이다.

 

 

 

반월성 서남벽

 

반월성 동남벽

 

남천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국립경주박물관 정문이 나온다.

 

국립경주박물관 후문에서 바라본 서쪽의 선도산

 

~서라벌(2)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