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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삼국 도성 기행

송파 석촌동고분군 : 백제를 건국한 근초고왕과 그 후왕들의 무덤은 아닐까?

<2011년 3월 4일>

 

 

<표제사진 - 장엄한 석촌동 3호고분. 필자는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론하고 있다.>

 

 

방이동 고분군을 둘러보고, 이참에 석촌동 고분군을 둘러보기로 작정한다. 고분 답사 글을 3년이 지난 지금에야 쓰는 까닭은 이제야 겨우 사론(역사 추론의 줄인말)의 개요 정도는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론은 다소 비약으로 보일 지 모르나, 실제 근거 자료는 충분하다. 필자는 사론을 정리하고 있다. 완성이 된다면 블로그에 올릴 생각이나, 일상이 번잡한 관계로 단기간 내는 힘들 것 같다. 아무튼 사론의 요지는 백제와 고구려 역사를 북부여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면 좋겠다는 것이다. 물론 신라의 역사는 북부여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그들의 출자는 분명 다르다. 

 

필자는 백제가 고구려가 아닌 부여 즉 북부여(해모수가 세운 해씨 왕조)에서 출자한 것으로 추론한다. 선비족 전연에게 패망한 북부여 유민들이 한강 유역으로 유맹을 왔고, 그 유맹 형상이 북부여 유력 가문들인 백가(百家)가 제해(濟海) 즉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서 별칭 백제라고 불린 것 같다. 그리고 북부여 유민을 이끈 북부여 왕계가 바로 근초고왕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근거는 중국 고대 사서들을 통시적으로 고찰한 결론이다. 자세한 근거는 이후 상술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조>를 읽어보면, 백제 근초고왕의 초기 20년은 거의 공백 상태로 나온다. 필자는 이 기간을 전연에게 패망한 만주의 북부여가 남부여대하고 백가제해하며 한강 유역에서 재기한 백제 건국의 최소 시간으로 추론한다. 필자의 추론에 따르면 실제 백제를 건국한 이는 근초고왕이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근초고왕 이전 왕계의 실상은 북부여 왕계로 사료된다.

 

백제 왕계가 고구려 추모(주몽)의 왕계라는 것은 후대 사가들의 오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고구려와 백제 건국신화나 전설이 왜곡된 것이다. 그 핵심은 고구려 사가들이 동명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추모를 동명성왕으로 존숭하여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조 동명왕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의 고유명사였다. 그런데 원래 부여와는 상관이 없었던 구려족이 졸본지역을 장악하면서 그 시조 추모를 북부여 왕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하며 졸본부여 유민들을 기만한 것에서 왜곡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후대에 이르러서는 추모를 아예 동명성왕으로 부르며 더 이상 북부여 왕계와는 단절시킨다. 그것은 이미 구려족이 북부여의 정체성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졸본부여에서 확고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후대 사가들이 원조와 아류 동명왕을 구분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왕도 백제왕도 동명왕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구절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런데 고구려가 모신 동명왕 사당에는 추모가, 백제가 모신 동명왕 사당에는 해모수가 숭모의 대상이었다. 실상은 이러함에도 후대의 역사가들은 동명왕은 추모뿐이라며, 백제 왕계 또한 그 뿌리가 동명왕 추모에 있는 것으로 오인하여 백제 건국신화 특히 온조설화를 만든 것이다.

 

고구려(구려족)는 처음에는 북부여에 복속된 종족이었다가 나중에 졸본지역에서 자립하면서 자신들이 해모수의 자손이라며 낭설을 퍼트리며 졸본부여로 자립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북부여와 대등하거나 우월하게 되자, 졸본부여라는 국호는 사라지고 구려를 높여 고구려라고 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게다가 해모수에게서 동명왕의 칭호를 빼앗아 자신의 직계 선조인 추모에게 부여하는 도적질까지 했다. 그 이름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북부여 왕계의 정통성은 백제에 있다. 고구려는 북부여 왕계와 관련이 없거나 아니면 곁가지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백제는 성왕 대에 비로소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냈다. 그는 사비로 천도하며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그는 만주 송화강 유역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삼한에 건설한 부여는 '남부여'라고 하며, 새로운 부여족의 출발을 알린 것 같다. 그리고 남부여는 가야를 건너 열도까지 지배한다.

 

흔히 천황가는 만세일계 즉 만대가 흘렀으도 그 계통은 하나라고 한다. 이는 <일본서기>의 편찬 방침이다. 즉 <일본서기>는 천황가 만세일계로 스토리가 짜여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천황가는 적어도 그 계통이 4~5번은 바뀌었다. 천황가의 마지막 왕계는 남부여 계통이다. 따라서 지금 천황에게는 만주의 북부여 왕가, 삼한의 남부여 왕가, 열도의 천황가 전통을 이어온 의미에서 만세일계의 부여 왕가의 피가 흐르는 고귀한 혈통(?)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일본 역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수렵기마민족 정복왕조설'로 유명하다. 이 학설의 요체는 4C 기마민족집단인 천황족이 만주에서 한반도를 거쳐 열도인 야마토를 최종 정복하였다는 것이다. 에가미는 '부여족' 대신에 '수렵기마민족'이라는 추상적인 말로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천황가의 만세일계를 보호한 것이다. 하지만 천황가는 스스로 자신들의 선조가 누구인지 잘 알 것으로 생각된다. 천황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북부여 해모수로부터 비롯되었다. 다만 일본과 일본인들의 정체성 혼란을 우려하여 비밀로 할 뿐이다.

 

우리와 일본 고대사는 부여 특히 북부여의 유맹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부여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 정체성은 확고히 서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 고대사를 역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필자가 성왕 이후의 백제를 일러 '남부여'라고 고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강 유역 대형 적석총은 온조왕나 비류왕, 혹은 다루왕이나, 개루왕의 무덤이 아니라 근초고왕이나 그의 아들인 근구수왕의 무덤이라고 생각된다.

 

 

안내문

 

석촌동 고분군 아래로 백제고분로가 지나간다.

 

 

<석촌동 3호 고분>

 

 

 

 

 

 

 

 

 

 

 

 

 

 

<그 외 고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