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0일>
<표지사진-금돌성 정상에서 바라본 상주 모서면 일대>
<삼국사기 태종무열왕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적혀 있다.
"태종 무열왕 7년(660)
여름 5월 26일,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천리에 달하는 병선을 이끌고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왔다. 21일,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도착하여,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려 한다.'고 말했다. 법민은 '우리 대왕께서는 지금 대군이 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대장군의 도착 소식을 들으신다면, 틀림없이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라도 달려 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했다. 왕은 기쁨을 금치 못하고,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하였다. 왕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이후 무열왕은 이곳 금돌성에서 김유신이 사비성을 함락시켰다는 보고를 듣게 된다. 무열왕은 왜 금돌성에 머물렀을까? 당시 금돌성의 지정학적 위치가 궁금하다.
지금의 금돌성은 경북 상주와 충북 영동의 경계인 백화산 자락에 위치한 5km가 넘는 거대한 포곡식 산성이다. 삼국시대 금돌성의 규모가 지금과 같은지는 더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겠지만 무열왕이 머물렀다는 기사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방어가 튼튼한 성이었다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겠다. 후대에는 왜구의 침입을 경계해 거대한 옹성 형태로 축조했을 테지만 삼국시대의 금돌성을 기초로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신라는 백화산 동쪽 계곡에다 왜 이런 거대 규모의 산성을 축조했을까?
신라가 삼한통일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백두대간 이서의 삼년산성(충북 보은)과 바로 이곳 금돌성(경북 상주) 때문이다. 삼년산성은 고구려와 남부여를, 금돌성은 남부여를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었던 유력한 신라의 교두보였던 셈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당시의 자연 국경선인 백두대간 중화지역을 어렵게 넘었다. 중화지역이란 어떤 곳인가?
백두대간 중에서 해발 고도가 제일 낮아 고대 동서 교통로의 핵심 지역이 바로 '중화지역'이다. '중화지역'은 고려시대 이곳의 두 지명이 '중모현'과 '화령현'이었는데, 이를 합성하면서 '중모현'의 '중'자와 '화령현'의 '화'자가 결합하여 생성된 말이다.
'화령현'은 신라의 '답달비군'이다. 답달비군의 영역은 오늘날 상주시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 일대로 추정된다. 면 이름 앞에 모두 '화'자가 들어가고 나머지는 방위를 지칭하는 동서남북을 사용하는 것이 특색이다. 답달비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곳은 상주시 화서면과 화동면의 경계상에 있는 원통산의 서편 자락에 소재하고 있는 노고산성이다. 노고산성은 '화령고성'으로 일컬어진다.
'중모현'은 신라의 '도량현'이다. 도량현의 영역은 상주시 모서면과 모동면 일대이다. 면 이름 앞에 모두 '모'자가 들어가고 역시 방위를 지칭하는 동서를 사용하였다. 이곳의 치소는 상주시 모서면 도안리 역마루(조선 초기까지 상평역이 있었다)마을과 모동면 덕곡리 안평마을 경계에 있는 중모산의 산정을 테뫼식으로 축조한 중모성이다. 중모성은 '안평산성' 혹은 '기병산성'으로 불린다.
신라가 비록 중화지역을 장악하고 현의 치소까지 마련했으나 아무튼 백두대간의 존재 때문에 백두대간 이서의 땅인 중화지역은 쉽게 고립될 수도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라는 중화지역 북쪽에 삼년산성을, 남쪽에는 금돌성을 쌓은 것이다.
처음에는 중화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성이 일단 축조된 후 부터는 그 위력이 배가되었다. 오히려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지로 활용된 것이다. 두 산성의 존재로 인해 중화지역을 우회해서 고구려군은 백두대간 죽령과 조령을 끊임없이 자극할 수밖에 없었고, 남부여는 백두대간 육십령을 넘어 신라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상대국 입장에서는 군대 운영의 측면에서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660년 사비도성을 직공한 신라 김유신 군대의 출발지가 금돌성이라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신라가 중화지역을 정복하고 난 후 금돌성과 삼년산성을 쌓지 않았다면 삼국 대회전의 현장은 중화지역이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고구려나 남부여가 백두대간 중화지역을 넘어 상주를 정복했다면 삼한통일의 주인공은 고구려나 남부여였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몇 년을 벼루다 이제야 겨우 상주 금돌성을 답사하게 되었다. 조금은 힘겨운 여정이었다. 금돌성을 답사하려면 백화산 등산로 가운데 상주 보현사에서 출발하는 원점회귀 산행을 해야 한다. 성벽으로 시작해서 성벽으로 끝나는 구간이라 일반 산행 코스로는 잘 추천되지 않는다. 영동 반야사의 절경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 코스는 한마디로 지루한 성돌과의 동행이라 할 수 있다. 자주 쉬어가면서 꼬박 6시간의 산행을 해야 했다.
상주 금돌성을 지나 영동가는 길은 금돌성 동쪽 구수천 팔탄을 지나거나 서쪽 모서면 금천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다.
오늘의 여정은 성벽을 따라 걷는 것이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다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너덜지대1
너널지대2
너덜지대 2개를 지나면 금돌성 외성이 나온다.
내성
내성에서 대궐터 거쳐 보문암터로 갔다.
건물지
건너편 남벽. 저곳도 성돌로 이어진다. 역시 현장을 오기전까진 산성의 규모를 짐작한다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된비알을 오르고 나니 대궐터가 보인다. 무열왕의 행궁터라고 전해진다.
대궐터 건물지
상주시 안내문은 형편 없다.
대궐터 지나자 또 다른 건물지가 나온다. 금돌성 내부는 수많은 건물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 흔적들
보문암 부속터
보운암터에서 다시 된비알을 올라 금돌성 북벽에 오른다.
복원된 금돌성 구간
북벽에서 바라본 백화산 동쪽의 상주시 모동면 일대. 연맥의 끝선이 백두대간이다.
백화산 정상인 한성봉 가는 길이다.
장군바위
금돌성 서벽 구간. 한성봉 가는 길이다.
장군바위에서 바라본 상주시 모동면 일대
금돌성 북벽에서 바라본 모서면 일대. 무열왕과 신라군은 이곳에서 서방의 남부여를 호시탐탐 노렸을 것이다.
금돌성 서벽에서 서북방을 바라보다. 저 멀리가 속리산의 연맥인가?
금돌성 서벽에서 서남방을 바라보다. 멀리 우뚝 솟은 산이 금산의 서대산(904.1m)일 것이다.
우측이 백화산 암릉구간이다. 흔히 백화지맥으로 불린다.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뒤돌아본 장군바위
백화산 정상 한성봉
과거에는 포성봉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한성봉으로 불린다. 한성은 큰성을 의미한다. 클 한.
이제 다시 보현사 회귀를 위해 금돌성 남벽 구간을 걸어야 한다.
한성봉 정상에서 남벽 구간 초입은 험로다.
저 아래 계곡이 구수천 팔탄으로 영동 반야사 가는 길이다.
모동면 일대
남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이 흐르고
끝없이 이러지는 금돌성 남벽구간
그 규모에 입이 벌어진다.
반야사 방향
금돌성 남벽에서 바라본 금돌성 서벽구간
구수천 팔탄 초입
드디어 금돌성 남벽 구간이 끝났다.
봉화터
차단성 내부. 혹 남벽구간이 침탈 받을까봐 차단성을 쌓았다. 좀전의 봉화터도 과거에는 차단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단성에서 바라본 모동면 일대
백두대간의 연봉들
차단성 성벽
산행 마무리 지점의 항몽대첩 기념탑
원점회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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