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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성기행/삼국 도성 기행

공주 송산리고분군 : 웅진시대 백제 왕조를 부활시킨 왕들의 무덤

<2014년 5월 25일>

 

 

<표제사진 - 무령왕릉 전경. 가운데 고분이 무녕왕릉이다. 좌측이 6호분, 우측이 5호분이다.>

 

 

<백제 왕조의 부활 (1)>

 

475년 한성 함락 이후 백제 왕조는 금강 연안의 구마나리(웅진)로 천도하였다. 말이 천도지 실제는 지방 호족의 도움으로 왕조가 더부살이를 했다고 보면 된다. 즉 왕권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중앙 권력은 취약했다. 사실 왕조를 유지한 것만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백제는 웅진시기 말 무령왕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마도 무령왕이 아니었다면 백제는 역사에서 그 자취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면 무령왕은 어떻게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475년 고구려 군대가 한성을 포위하자, 백제 개로왕은 결단을 내린다. 왕계를 잇기 위해 태자 문주를 탈출시켜 신라에 보내 구원병을 청하게 한다. 이때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란 두 인물도 태자와 동행을 한다. 이후 문주태자가 신라군 1만명을 이끌고 한성에 도착하지만, 이미 개로왕은 고구려군의 포로가 되어 수모를 당하고 아차성 아래에서 처형된 이후였다. 이때부터 백제 조정의 중심은 한강에서 금강 연안의 웅진으로 옮겨왔다.

지금의 공주시 의당면에는 수촌리고분군이 있다. 이곳은 고대 웅진 지역을 호령하던 지방 호족의 무덤들로 사료된다. 학자들 중에는 수촌리고분군이 백제 8대 대성 귀족의 하나인 백씨의 선조묘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백제 조정은 웅진 호족의 양해 아래 지금의 웅진성으로 도성을 옮겨왔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 조정은 웅진 호족에게 더부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왕권은 취약하였다. 이런 연유로 문주왕은 병관좌평 해구에게 암살되고, 그 아들 삼근왕도 재위 3년차에 많은 의문을 남긴 채 죽는다.

 

이런 와중에 누가 있어 백제 왕조를 부활시킬 수 있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3년(477년) 조> 기사에 그 단초가 보인다.

 

문주왕 3년 여름 4월 왕의 아우 곤지를 임명하여 내신좌평을 삼고 맏아들 삼근을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내신좌평 곤지는 무령왕의 할아버지로 나온다. 즉 웅진기 백제 왕권을 회복한 무령왕릉이 곤지 계통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곤지란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곤지가 문주왕의 아우로 나온다. 그렇다면 곤지는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일본서기 웅략기>는 곤지가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온다.

 

웅략천황 5년(461년) A. 여름 4 백제 가수리군(加須利君)[개로왕이다]은 그의 아우 군군(軍君)[곤지(昆支)이다]에게 "네가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군군이 "임금님의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임금님의 부인을 저에게 주시면 그런 다음 떠나라는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다다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작별하고 조정에 파견되는 명을 받들었다B. 6월 1일 임신한 부인이 과연 가수리군의 말처럼 축자(筑紫)의 각라도(各羅嶋)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도군(嶋君)이라 하였다. 이에 군군은 곧 한 척의 배로 도군을 본국에 보내었는데, 이가 무령왕이 되었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주도(主嶋)라 일컬었다. C. 가을 7 군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을 두었다. [<백제신찬(百濟新撰)에 "신축년(461년)에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昆支君)을 보내어 대왜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했는데,인 왕의 우호를 닦기 위해서였다."라고 한다. <일본서기 웅략기>

 

<일본서기>나 <백제신찬>을 보면 곤지는 개로왕 7년인 461년 4월에 한성을 떠나 7월에 야마토(倭)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곤지가 형왕인 개로왕의 임신한 부인과 동행한 점이다.

 백제는 부여 계통인데 부여나 고구려는 형사수취제라는 것이 있다. 즉 형이 죽으면 형수는 동생의 부인이 된다는 고대 관습이다. 형사수취제는 오늘날의 가족 윤리와는 맞진 않지만, 고대 대가족 제도 하에서는 대가족의 세력을 보존한다는 측면에서 당시의 윤리로는 일상적인 일이다. 물론 동생이 형수의 가족을 거부하면 가족이 분화되겠지만, 동생 입장에서는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곤지의 경우에는 형왕인 개로왕이 살아 있고 그것도 왕의 부인을 달라고 하는 것은 당시 윤리나 관습에는 어긋난다. 그렇다면 이런 당시의 반윤리나 반관습이 사서에 채록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백제 왕계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자구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 무열기>를 보자.

 

무열천황 4년(502년) 이 해 백제 말다왕(동성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제거하고 도왕(嶋王)을 세우니 바로 무령왕이다.[<백제신찬>에 이르기를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거했다. 무령왕이 즉위하였는데 휘는 사마왕(斯麻王)이고 곤지왕자(琨支王子)의 아들이니 말다왕의 이복형이다. 곤지가 왜로 갈 때에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으로부터 되돌려 보냈는데 서울에 이르지 못하고 섬에서 낳았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지금 각라(各羅)의 바다 가운데 주도(主嶋)가 있는데 왕이 태어난 섬이어서 백제인들이 주도라 부른다. 지금 생각건대 도왕은 곧 개로왕의 아들이고 말다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여기서 이복형이라고 한 것은 미상이다.] <일본서기 무열기>

 

<일본서기 무열기 4년 조>의 주석에서 인용한 <백제신찬>을 보면, 사마왕 즉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로 나온다. 동성왕(말다왕)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모두 곤지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독 무령왕에 대해선 제각각이다. 정리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 즉 곤지의 손자로,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아들로, <백제신찬>은 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나온다.

이 때문인지 <일본서기>의 편찬자조차 헛갈려한다. '지금 생각건대 도왕(무령왕)은 곧 개로왕의 아들이고, 말다왕(동성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여기서 이복형이라고 한 것은 미상이다.' <백제신찬>에서 왜 무령왕과 동성왕을 이복형제라고 한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기술했다.

 

 그렇다면 진실을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백제 왕계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백제신찬>은 개로왕에서부터 무령왕까지의 5대를 간지(干支)를 쓴 편년체 사서로 알려져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신찬>의 기사가 3곳에서 인용했다. 필자는 <백제신찬>의 목적이 백제 왕계가 개로왕계에서 곤지왕계로 바뀐 것을 적기 위해서였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훗날 필요에 의해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일본서기>는 동성왕과 무령왕 모두 개로왕 계통이라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런 연유로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곤지가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고침으로써 해결했고, <일본서기>는 곤지의 야마토 정착 설화에서 임신한 형수를 언급하며 무령왕이 원래는 개로왕의 아들이었다는 식으로 해소하였다. 당시의 형사수취제 관습을 거스르며까지 자신들이 개로왕 계통이라는 것을 유포한 것이다.

이는 아마도 곤지 계통이 백제 왕으로 등극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과 국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조작한 스토리로 보인다. 즉 동성왕의 실정으로 곤지 계통이 귀족들의 반감을 사자, 무령왕은 자신은 실제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계통까지 조작한 것으로 추론된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백제 왕조는 부활하였다. 그 중심에 곤지의 아들들이 있었다. 동성왕과 무령왕.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백제는 웅진기를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공주 송산리고분군은 백제 웅진시대 왕들의 무덤이다. 그곳에 바로 곤지왕, 동성왕 그리고 무령왕의 무덤이 있었다.

 

 

송산리고분군 안내도

 

 

 

송산리고분군 전경

 

배롱나무. 백일홍 나무로 수피가 하도 미끄러워 일본에서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무라고 한다.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다음은 6호분 모형관이다. 송산리6호분은 전축분으로 무령왕의 왕후 묘로 추정된다. 참고로 무령왕릉은 합장묘인데 무령왕과 같이 묻힌 여인은 무령왕의 왕후가 아닌 대부인으로 추정된다. 대부인은 무령왕의 2번째 여인으로 성왕의 친모로 추정된다. 아마 무령왕의 왕후는 일본에서 함께 건너온 부인이었을 것이고, 대부인은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백제 귀족 해씨나 연씨와 결합하면서 맞이한 여인으로 보인다.

 

 

 

 

 

 

 

 

 

 

 

무령왕의 왕후는 일본에서 건너와 남편을 대부인에게 빼앗기고 아들로 추정되는 순타태자는 정치적 이유로 야마토(일본)로 건너가자, 홀로 쓸쓸히 6호분에 묻혔을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의 흉상

 

 

 

일요일이라 모형관은 견한온 아이들이 많았다. 필자는 부산의 한 초등학교 아이들과 뒤섞여 모형관을 둘러보게 되었다. 인솔 여선생과 동행한 학부모들의 갱상도 사투리에 모형관은 왁자지껄했다. 근자에 다녀본 전시관 중에서 이처럼 활력이 넘친 곳은 전주국립박물관 이후 처음이다.

 

 

 

 

 

 

 

 

 

 

 

 

 

 

 

 

 

 

 

 

 

아이들이 무령왕릉 모형관을 점거(?)하는 바람에 바로 모형전시관을 나와야 했다.

 

 

가운데가 무령왕릉이고, 좌측이 6호분, 우측이 5호분이다. 필자는 5호분이 근신 백가에게 시해된 것으로 알려진 비운의 군주 동성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허나 실제 백가에게 동성왕이 살해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무령왕을 따르는 귀족들이 내세운 무사집단이 동성왕을 살해하고 그 책임을 가림성주인 백가에게 뒤집어 씌웠을 것으로 추론된다.

 

 

 

 

6호분. 무령왕의 왕후의 묘이다. 왕후의 아들로 추정되는 순타태자는 백제 내부 권력 투쟁(성왕과의 차기 왕위 쟁탈전)에 밀려 야마토 조정에 의탁하였다.

 

 

 

 

 

 

 

 

 

5호분

 

 

 

 

무령왕릉

 

 

 

 

 

1-4호분 오르는 길

 

1-4호분. 이곳에 동성왕의 무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방단계단형 적석유구. 한성에서 처형된 백제 개로왕의 가묘라는 설과 제단이라는 견해로 갈린다.

 

 

송산리 고분군에 올라서면 동쪽 웅진성이 보인다.

 

웅진성

 

 

고분군 뒤에서 전면을 바라보다

 

 

 

정지산 유적 가는 길. 정지산 유적은 백제 대빈을 설치한 곳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