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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기행 (충청도)/대전, 옥천

대전 월평동산성(1) : 고구려군이 금강을 돌파하다(2)

<2009년 12월 7일>

 

 

대전에서 유성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만년교 남쪽 표고 137.8m의 야산 정상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둘레는 약 710m이다. 산성 서쪽은 갑천의 지류인 성천(省川)이 흐르며 자연 해자 역할을 한다.

월평동 산성의 북동쪽으로는 갑천을 따라 유성구 구성동 성두산 공원인 구성동산성이 남부여의 소비포현성이 유력한 적오산성과 남부여의 우술군성으로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한남정맥의 지맥인 식장지맥의 보루성들과 이어지며, 통영대전고속도로 판암IC 4번국도 맞은 편 산인 판암동 산성으로 이어져 옥천으로 나갈 수 있다. 남부여군이 지키지 못한 탄현을 옥천 지역에 비정하는 근거는 식장지맥이 옥천의 관산성과 마주하며 국경을 이룬 사실에서 근거한다. 신라의 김유신 군대가 식장지맥 부근의 산성들을 공략하지 않고 사비성으로 나아갈 때, 판암동산성 근방의 탄현을 지키지 않고 농성의 형태로 전쟁을 치뤘기 때문에 전술적 요지인 탄현이 너무 쉽게 뚫린 것이다. 결국 다급한 나머지 남부여군의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서 김유신 군대를 맞이하여 최후의 전쟁을 치룬 것이다.

서남쪽으로는 진잠향교 뒷산인 성북동산성, 호남선 흑석리역 뒷산인 흑석동산성으로 이어져 남부여의 황산성에 이른다. 남동쪽으로는 대전시 중구 뿌리공원 유등천 건너편 산인 사정성과 연결되어 진산-금산-진안-장수를 거쳐 가야로 이어졌다. 사정성에서는 동쪽으로 비파치산성과 식장지맥의 닭재를 지나 남부여 성치산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벽은 거의 붕괴되었지만 성을 쌓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서벽의 일부에서는 바깥벽·안벽이 남아있다. 산성의 동남모서리에는 인공으로 만든 언덕이 있는데, 이 곳이 산성내의 최고 높은 곳이 된다. 성문터는 동·서·북벽에 각각 한 곳씩 남아있는데, 동문터의 너비는 5m이고, 서문터는 너비 3.6m로 서벽의 중간 부분에 있다. 북문터는 문폭이 너비 3m로 성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에 있는데, 성벽이 약간 어긋나 있어 통행하려면 S자형으로 굽어 들어가야 한다. 북문터에서는 우물 흔적도 보이는데 이 부근이 매우 습한 것으로 보아 성내의 빗물을 처리할 집수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내에는 너비 7m-12m의 도랑으로 보이는 통로가 전체에 돌려져 있고 동,서벽의 내부에는 평지가 많아 당시 건물터로 추측된다. 이곳에서 그릇받침조각을 비롯한 백제시대의 토기조각이 수습되었다.

대전광역시에서 이 산성의 동남쪽 외곽 능선지역에 정수장건설을 계획함에 따라 1990년 9월에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를 한 후 국립공주박물관과 합동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곳에서 백제의 집자리, 저장구덩이, 성벽, 말뚝을 박아 생긴 구덩이 등 유구가 확인되었다. 또한 세발토기(삼족토기), 그릇받침(기대), 기와, 말안장이 출토되어 월평동 산성의 사용시기와 성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대동지지(大東地志)>를 보면 유성현은 백제시대에는 '노사지현(奴斯只縣)'으로 불리웠으며, 옛 유성은 유성현으로부터 동쪽으로 4리의 거리에 있었다. 아울러 이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5리의 거리에 유성산성이 위치한다고 하였다. 또한 백제부흥군이 '내사지성(內斯只城)'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 내사지성이 현성(縣城)인지 아니면 관내의 어떤 산성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사지현의 현 지명인 유성관내에서 찾을 수 있는 구성동산성과 유성산성을 비교해 볼 때 유성산성이 내사지성에 보다 가까운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