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성기행 (충청도)/대전, 옥천

대전 계족산성(1) : 신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라

<2010년 12월 10일>

 

 

 

표지사진 - 계족산성에서 바라 본 견두산성과 대청호 연안

 

 

 

계족산성은 <삼국사기>의 옹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찰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옹산성에 대한 고찰

 

나당군은 남부여 사비도성과 웅진성을 함락시키고 웅진성에다 도독부를 설치한다. 하지만 웅진강 서쪽에서 남부여 복신의 세력이 발흥하여 웅진강 동쪽까지 세력을 확대하자 웅진과 신라를 연결하는 웅진도가 끊겨 웅진도독부성의 보급에 차질이 발생하였다. 이에 신라군은 복신의 근거지인 주류성을 공격한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웅진도독부 이남에서 여러 성들이 배반의 기치를 든다. 그 결과 웅진도독부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다. 이즈음 문무왕은 당나라에게 대 고구려 전쟁에 대한 참전 요청을 받게 된다.

 

6월에 이르러서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는 겨우 끝났으나 상복(喪服)을 벗지도 못하였으므로 응하여 [웅진으로] 달려갈 수 없었지만, 칙명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 등이 이르러서 칙명을 받드니 ‘신라를 보내 평양에 군량을 나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웅진에서는 사람을 보내와 부성이 고립되고 위태로운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유총관이 저와 상의하였는데, 제가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으로 통하는 길이 끊어질까 두렵다. 만약 웅진으로 가는 길이 끊어진다면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는 곧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유총관이 마침내 저와 함께 좇아서 먼저 옹산성(甕山城)을 쳐서 옹산을 빼앗고 웅진에 성을 쌓아 웅진으로 가는 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에 양식을 나르자니 황제의 뜻을 어길까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수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늙고 약한 자를 뽑아 보내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들은 가는 길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백 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조 중에서 답설인귀서 부분>

 

 하지만 신라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당나라의 최종 목적은 고구려 정벌에 있지만, 신라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남부여 지역을 안정시키는데 우선 순위가 있었다. 당나라 함자도 총관 유덕민이 평양에 군량 원조를 하라는 칙명을 들고 나타났다. 이에 문무왕은 평양 군량 수송 작전에 신라군이 대규모로 동원된다면 웅진도가 끊겨 도독부는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명분이 부족한 유총관으로서는 신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군세를 합하여 먼저 웅진도를 안정시키려고 웅진강 동쪽의 남부여 성들을 구축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합의 후에 드디어 문무왕은 당나라의 대 고구려 전쟁에 대한 참전 요구를 받아들였다. 신라 입장에서는 남부여 부흥군이 난립한 상황에서 대 고구려 참전은 국운을 건 모험이었다. 그 결과 신라 전 영역인 5주(상주·하주·남천주·수약주·하서주) 모두를 군사 조직으로 재편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각 주에 총관을 임명하고 전시 체제로 돌입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웅진도를 안정시키려고 웅진강 동쪽의 남부여 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다. 

 

문무대왕은 유신·인문·문훈(文訓) 등을 거느리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로 향하다가 남천주(南川州)에 행차하게 되었다.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은 군사를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띄워 혜포(鞋浦)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으므로 또한 남천주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때 해당 일을 맡은 관리가 “앞길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瓮山城)에 주둔하며 길을 막고 있으니 곧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이에 유신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성을 에워싸고는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여 적장에게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너희 나라는 공손하지 않아 큰 나라의 토벌을 받은 것이니 명을 따르는 자는 상을 내리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오. 지금 너희들이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 무엇을 하고자 함이더냐? 마침내 반드시 패멸할 것이니 차라리 나와서 항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다만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귀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적들이 큰 목소리로 “비록 작은 성이지만 무기와 식량이 모두 충분하고 군사들이 의롭고 용맹하니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외쳤다. 유신이 웃으며 “궁지에 몰린 새와 곤경에 처한 짐승은 오히려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라고 말하였다. 이에 깃발을 휘날리고 북을 두드리며 그들을 공격하였다. 대왕이 높은 곳에 올라 싸우는 군사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격려하니, 군사들은 모두 떨치고 나아가 창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9월 27일 성이 함락되자 적장을 붙잡아 죽이고 그 백성들은 풀어주었다. 공을 논의하여 장수와 병졸들에게 상을 주었고 유인원 또한 비단을 나누어 주되 차등을 두었다. 이에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배불리 먹여 가지고 당나라 군사와 합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의 내용을 보면, 신라군과 웅진도독부의 당나라군이 남천주(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설봉산성 일대)로 집결하여 북진하던 중 옹산성 전투를 치룬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조> 중의 <답설인귀서> 내용과 정면 배치되는 일이다. 즉 신라는 대 고구려 참전에 앞서 웅진도 안정을 위하여 웅진도독부성 동쪽의 남부여 산성들을 함락시키고자 했다. 그 절실한 요구를 외면한 채 신라군이 남천주로 향했을 리가 만무하다. 당나라야 신라군이 어떠한 희생을 치러도 군량 수송을 하면 그만이겠지만 신라는 기껏 힘들여 이룬 남부여 멸망을 눈앞에 둔 채 보급대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남부여 부흥군들이 웅진 동쪽까지 진출한 마당에 그들만이라도 제거하여야 대 고구려 참전의 명분이 있는 것이다. 당나라도 이러한 신라의 요구를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유덕민 함자도 총관도 기꺼이 옹산성 전투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급한 요구를 우선 들어주어야만 군량 수송 작전이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판단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김유신 열전>의 옹산성 전투 부분을 읽다보면, 웅진도독부의 당나라 군대도 옹산성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즉 남천주에 나당군이 집결한 것은 아니지만 웅진부 도독인 유인원도 옹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그 공로가 인정되어 비단을 나누어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옹산성 전투는 신라군과 웅진도독부의 당나라 군이 합세하여 옹산성 동서에서 협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년(661) 8월에 대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 때에 사자(使者)가 와서 “백제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甕山城)에 머물면서 길을 막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알렸다. 대왕이 먼저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 복종하지 않았다. 9월 19일에 대왕이 웅현정(熊峴停)에 나아가서 여러 총관(摠管)과 대감(大監)들을 모아 놓고 몸소 가서 서약하도록 하였다. 25일에 군사들이 나아가 옹산성(甕山城)을 포위하였다. 27일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을 불태우고 수천 명을 잡아 목 베어 죽여 마침내 항복을 받았다. 승전의 공을 논하여 각간(角干)과 이찬(伊湌)으로써 총관(摠管)인 사람에게는 검(劍)을 주었고, 잡찬(迊湌)이나 파진찬(波珍湌) 또는 대아찬(大阿湌)으로써 총관인 사람에게는 창을 주었으며, 그 이하는 각각 관등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 웅현성(熊峴城)을 쌓았다. 상주(上州) 총관(摠管) 품일(品日)이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太守) 대당(大幢)과 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太守) 철천(哲川)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하여 1천명의 목을 베었다. 백제의 달솔(達率) 조복(助服)과 은솔(恩率) 파가(波伽)가 무리와 함께 항복하자, 조복에게는 급찬(級湌)의 관등를 주어 고타야군(古陁耶郡) 태수(太守)로 삼았고, 파가에게는 급찬의 관등과 아울러 토지와 집, 옷 등을 내려 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 조>

 

 신라군은 시이곡정에 이르러 옹산성의 남부여군에게 투항하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웅진도독부의 당나라 군은 사비에서 배를 타고 혜포(鞋浦)에 상륙하여 옹산성 공격을 준비한 듯하다. 이로 추정컨대 혜포는 금강 연안의 포구로 지금의 신탄진 부근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남부여군은 최후의 결전을 각오하고 최후통첩을 거부한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옹산성을 대전시 대덕구 장동의 계족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계족산성은 대전의 진산(鎭山)인 계족산 정상(424m)에서 북동쪽으로 길게 발달한 능선을 따라 약 1.3km 떨어진 지봉 정상(431m)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성벽은 주로 내탁(內托)공법에 의하여 쌓았다. 산성의 둘레는 약 1,650m로 장기 농성에 적합하다.

 그리고 옹산성 공격과 비슷한 시기에 상주 총관 품일이 이끈 부대가 우술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것을 보면 옹산성이 우술성과 지근거리에 있는 산성임은 분명하다. 우술성은 대전시 대덕구 읍내동 지금의 회덕향교 일대로 계족산성과는 지척간이다.

 결과적으로 신라군이 대 고구려 참전 이전에 웅진도를 안정시킴으로써 남부여군의 부흥전쟁의 기세는 한풀 꺾이게 된다. 그리고 향후 부흥전쟁의 형국이 웅진도독부 서부와 남부 일대로 한정되면서 신라의 남부여군 소탕 작전은 원활한 보급 속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전쟁의 양상이 뒤바뀌게 되었다. 신라 승리의 기틀이 이곳 옹산성과 우술성 전투에 있어던 것이다.

 

 

 

 

질현에서 출발하여 식장지맥 능선을 따라 질현성과 6개 보루를 답사한 후 절고개로 나아가다 보면 나무가지 사이로 계족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책로

 

 

계족산성이 희미하게 보인다.

 

 

 

 

 

늘씬한 나무들이 즐비하다.

 

 

서쪽의 대전시내. 아래가 경부고속도로이다.

 

 

계족산 봉황정 부근

 

 

서쪽으로 갑천이 희미하게 보인다.

 

 

계족산성. <삼국사기>의 옹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남부여 부흥군이 계족산 서쪽 아래 우술성과 이곳 옹산성에 주둔하며 나당군의 보급로인 웅진도를 차단한 것으로 이해된다.

 

 

 

 

 

동쪽의 대청호. 문무왕이 이끈 신라군은 보은 삼년산성-매곡성(보은군 회인면 소재지)-호점산성을 거쳐 필자가 <삼국사기>의 시이곡정으로 추정하는 덕고성(대전시 동구 직동 냉천마을 북쪽 산성) 부근에서 옹산성에 웅거한 남부여군에게 투항을 권고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절고개 1.3km, 계족산성 3.9km. 이정표의 거리는 조금 믿기 어렵다. 실제 느끼는 거리는 이보다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자

 

 

산책로는 너무도 평탄하다.

 

 

절고개가 300m 앞이다.

 

 

계족산성 산정

 

 

 

 

 

질현성 6개 보루 중 하나일 수 있는 곳을 우회하는 산책길을 따른다.

 

 

석축의 흔적이 아닌 너덜지대임

 

 

저 봉우리가 질현성 6번째 보루란 말인가? 예전에 올랐을 때도 그닥 보루란 느낌은 없었는데... 일행이 없다면 올라 보겠는데... 오늘은 자세한 산성 답사는 못하겠구나!

 

 

예쁜 산책로 

 

 

절고개 도착

 

 

 

 

 

절고개

 

 

앞서가는 일행들

 

 

동쪽의 대청호와 백골산 그리고 고리산(환산). 성왕의 죽음과 관련된 장소이다. 고리산성 전쟁의 패배로 나제간에는 원한이 깊어지고 대회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대전 시내. 서남쪽(사진의 좌측)으로 유등천이 보인다. 그리고 우측으로는 갑천이 희미하게 보인다. 대전시는 3개 하천이 삼태극을 이루며 형성된 충적 지대에 건설된 도시이다. 남쪽에서 북류하는 대전천과 유등천이 합류하여 동구 대화동(구 회덕) 부근에서 역시 남에서 힘차게 북류하는 갑천에 합강한다. 그리고 갑천은 신탄진 부근에서 금강으로 합류하는 것이다.

 

 

헬기장을 향하고 있는 일행들

 

 

헬기장 아래 고개 부근에서 바라 본 개머리산. 한자로는 견두산(犬頭山)이다. 견두산성이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곳 견두산성이 문무왕이 옹산성의 남부여군에게 최후 통첩을 날린 곳인 웅현정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위치로 보면 옹산성의 턱밑이라 이곳까지 진출한 신라군을 보면서 옹산성에 웅거한 남부여군은 투항도 생각해 보았을 듯하다.

 

 

헬기장에서 바라 본 백골산성과 고리산성. 아! 남부여 군주 성왕이여! 그대의 위대한 업적은 남부여를 개창한 것이리라. 그대들의 정통성을 선언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았으니 이 아니 원통한가? 필자가 백제를 남부여로 부르는 것은 성왕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밝히며 남부여로 국호를 삼았기 때문이다. 이후 국호를 바꾼 일이 없으므로 계속 남부여로 호칭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헬기장

 

 

성재산 오르는 산책로

 

 

한번 더 대청호와 고리산을 조망한다.

 

 

서쪽의 장동계곡.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남부여 우술군이 있던 지금의 회덕 일대이다.

 

 

계족산 봉황정. 저곳에 서면 서쪽 아래로 남부여 우술군의 치소였던 우술성이 보인다. 우술성은 지금의 회덕향교 주변이다. 우술성과 이곳 옹산성 일대는 신라군이 동서로 진격하여 동시에 함락시켰을 것이다. 우술성은 황산벌의 소년 영웅인 화랑 관창의 아버지인 품일이 함락시켰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성재산(398m) 정상

 

 

대청호. 백골산과 고리산.

 

 

지나온 식장지맥의 능선

 

 

개머리산. 견두산성. 필자는 신라군의 웅현정으로 이해된다.

 

 

계족산 봉황정

 

 

 

 

 

장동 계곡

 

 

드디어 계족산성이 보인다.

 

 

계족산성 남문 부근

 

 

서남쪽의 계족산 봉황정

 

 

남문 부근

 

 

지나온 식장지맥 능선

 

 

동남쪽

 

 

옛 성곽

 

 

옛 성곽은 언제 무너질지 위태로워 보인다.

 

 

남문 부근에서 바라 본 견두산성. 계족산성의 턱밑이라 남부여 부흥군의 두려움은 더했으리라. 견두의 개 이빨이 닭 다리를 무는 꼴이니 이미 지명에서 옹산성 전투의 승패가 자명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견두산성을 웅현정으로 추측한다.

 

 

남문 부근에서 바라 본 동쪽 계족산 봉황정. 아래 임도길이 보인다.

 

 

남문 오르는 길

 

 

 

 

 

산성 내부

 

 

 

 

 

계족산 봉황정

 

 

 

 

 

장동 계곡과 회덕 부근

 

 

 

 

 

 

 

 

 

 

 

갑천 건너 사진의 왼쪽의 엑스포아파트이며, 오른쪽이 대덕테크노밸리이다. 그 중간이 적오산성으로 남부여 우술군의 속현이던 소비포현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고대에는 갑천과 금강이 합강하는 대덕테크노밸리와 신탄진 일대가 거대한 습지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소비포는 이 일대의 최대 항구로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이 사비 포구에서 혜포로 나와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에 합류한 곳도 어쩌면 소비포였을 지도 모른다. 물론 '소비포=혜포'라는 견해는 추정일 뿐이지만 혜포는 이 부근의 포구를 지칭하는 것임에는 틀림 없을 것 같다.

 

 

 

 

 

내부에서 바라 본 남문

 

 

정면에 보이는 산은 함각산(315m). 견두산과 함각산 사이로 지난 번 답사했던 마산동산성 가는 길이다. 좌측 골짜기 끝 지점 대청호 합류하는 오른쪽이 덕고성이며, 덕고성 오르는 골짜기가 피골이다. 피골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성왕 대의 관산성 및 환산성 전투 당시일 수도 있지만, 옹산성으로 접근하는 신라군에 대항하여 덕고성의 남부여군이 흘린 피가 많아서 피골이라는 지명이 유래한 것일 수도 있다. 필자는 덕고성을 시이곡정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성 내부

 

 

좌측이 함각산, 우측이 견두산성. 그 사이로 마산동산성 가는 길이다. 이곳은 부흥 전쟁이 벌어기 전 남부여 동부전선으로 이중 삼중의 산성을 구축하여 신라군을 방어하던 곳이다.

 

 

서쪽 봉황정과 그 너머 계룡산 자락. 계룡산을 넘어면 바로 웅진(지금의 공주)과 사비(지금의 부여)이다. 옹산성은 웅진도의 길목에 자리잡아 신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요지였던 것이다.

 

 

대전시내

 

 

대덕테크노밸리로 갑천과 금강이 합강하는 지점이다. 고대 이 일대는 거대한 습지였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