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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남부여부흥전쟁

청양 계봉산성 : 과연 남부여부흥전쟁의 성지 두릉윤성인가?

<2010년 12월 24일>

 

 

표지사진 - 정산면 서정리 9층석탑에서 바라 본 계봉산성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던 금요일 오후(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이브날이다.) 청양 계봉산성을 올랐다. 오랫 동안 가슴에 품었던 산성이었지만, 답사는 이제야 하게 됐다. 필자는 산성 답사기를 쓰면서 항상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대부분의 산성이 필자의 인지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퇴락한 유적(기념물)에서 고대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상상하는 재미는 좋지만, 혹여 필자의 오류로 인해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매번 의구심에 잠긴다. 물론 역사의 신이 있어 그 진실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무심히 흘러간 시간에서 인간이 역사의 진상을 보게 되는 것이 과연 몇 %나 되겠는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역시 역사적 진실을 찾는 작업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필자의 산성 답사의 끝은 어디일까 하고 상상도 해본다.

 

청양 계봉산성은 남부여 사비도성의 북방 방어성인 열이현의 치소이자 남부여 부흥전쟁의 메카인 두릉윤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솔직히 두릉윤성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계봉산성에 대한 답사를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각을 거꾸로 하니 답사에 대한 용기가 생겼다. 즉 먼저 답사하고 두릉윤성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어서다.

 

 

~ 두릉윤성에 대한 고찰 ~

 

7년(660) 11월 5일에 왕이 계탄(雞灘)을 건너서 왕흥사(王興寺) 잠성(岑城)을 공격하였는데, 7일에 이겨서 7백 명의 목을 베었다. <신라본기>


신라군은 계탄을 건너 왕흥사 잠성 공격을 신호탄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금강 이북의 남부여군을 공격하였다. 왕흥사 잠성은 지금의 왕흥사지 북쪽 해발 120m의 산정에 토축한 울성산성이다. 사비도성인 부소산성의 낙화암에서 보면 금강 바로 건너편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신라군에게는 왕흥사 잠성이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금강 이북 공격의 신호탄은 왕흥사 잠성일 수밖에 없다. 무열왕은 금강 도하 3일 만에 잠성을 함락시키고 7백 명의 남부여군을 학살하였다.


8년(661) 봄 2월에 백제의 남은 적병들이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해 왔으므로 왕이 이찬(伊湌)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迊湌) 문왕(文王), 대아찬(大阿湌) 양도(良圖), 아찬(阿湌) 충상(忠常) 등으로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보좌케 하였다.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欻)과 욱천(旭川)을 남천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다. <신라본기>


왕흥사 잠성의 함락에도 불구하고 661년 2월 남부여군은 대담하게도 사비성을 직접 공격하였다. 사비성 공격의 주체는 두량윤성의 남부여군으로 사료된다. 이에 신라군은 남부여 부흥군의 강력한 토대인 두량윤성을 구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삼아 군 조직을 편성하고 곧바로 두량윤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3월 5일에 도중에 이르러서 품일(品日)이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성(豆良尹城) 남쪽에서 군영(軍營)을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의 사람들이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보고 갑자기 나와서 생각지도 않게 쳤는데, 우리 군사는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신라본기>


<삼국사기 잡지 지리3 부여군 조>에 따르면 신라는 남부여 도성이 있었던 소부리군을 부여군으로 개칭하고 영현으로 석산현과 열성현을 두었다고 한다. 석산현은 남부여의 진악산현이며, 열성현은 남부여의 열이현이었다. 신라가 부여군에 편재한 두 영현은 원래 남부여 도성인 소부리성(사비성)의 남북 방어성이 있던 곳이다. 소부리성의 남방 방어성인 석성산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부여군 석성면 일대의 진악산현이며, 북방 방어성인 계봉산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청양군 정산면 일대의 열이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잡지 지리4 백제 조>에 따르면 남부여의 열이현은 두릉윤성(豆陵尹城)·두곶성(豆串城)·윤성(尹城)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두릉윤성은 열이현의 치소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남부여군은 나당군이 진주한 금강 이북 바로 북쪽에서 소부리성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두릉윤성에 대한 신라군의 공격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군이 감행한 두릉윤성에 대한 공격은 녹록치 않았다. 남부여군은 신라군 진영을 기습하여 두량윤성 전투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3월 12일에 대군(大軍)이 고사비성(古沙比城)의 밖에 와서 주둔하면서 두량윤성(豆良尹城)으로 나아가 공격하였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신라본기>


역사학자 중에는 고사비성(古沙比城)을 고사성(古沙城) 또는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으로 보며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는 두량윤성에 대한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 기사와 정면 배치되며 당시 남부여군과 신라군과의 전투 경로와 위치도 맞지 않다. 아마도 고사비성은 옛 사비성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신라군은 36일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두릉윤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문무왕 3년(663) 5월 왕은 김유신(金庾信) 등 28명의 장군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쳐서 모두 항복시켰다. <신라본기>


신라군이 두릉윤성을 함락시킨 것은 남부여 부흥군의 도성인 주류성을 함락시킨 663년 5월의 일이다. 이는 두릉윤성이 부흥 전쟁 내내 사비성 북방에서 나당군의 정수리를 항상 위협하였다는 의미이다. 만약 두릉윤성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주류성도 오랜 기간 동안 버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끝>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두릉윤성 전투의 시말을 보면 주류성 및 임존성과 더불어 두릉윤성이 남부여 부흥군의 성지임이 분명하다. 다만 두릉윤성이 청양 계봉산성인지는 궁구해 볼 문제다. 왜냐하면 칠갑산 산정 남쪽의 청양 장평면 적곡리산성(일명 두율성 내지 두솔성으로도 불린다)의 길이가 4.5km에 이르며, 사비도성에서 보면 계봉산성은 동북방에 치우쳐 있는 반면, 적곡리산성은 정북방에 위치하며 남쪽에 보조성을 거느리며 나당군이 진주해 있는 사비성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두릉윤성은 칠갑산 자락을 끼고 있으며, 임존성이나 주류성 보다는 두릉윤성이 나당군의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을 것으로 사료되어 칠갑산이 남부여 부흥군의 메카였음도 분명하다.

 


 두릉윤성 이정표. 정산면 가는 36번 국도 우측에 있다.

 

청양군 목면 지곡리 안못골 가는 입구에서 바라 본 계봉산성 전경

 

이정표가 안못골 마을에서 계봉산성 가는 임도를 가리키고 있다.

 

임도오르기 전 폐 축사

 

 임도 입구의 나팔부는 목각상

 

남부여인의 정신을 기린 듯하지만 누군가 훼손시켜 놓아 안타깝다.

 

임도

 

소류지

 

 

 

 

 

산성 입구 도착

 

 

 

 

 

산성 오르는 길

 

남문터

 

백제고성 두릉윤성 사실기. 좌평 정무가 두릉윤성의 수장이었는지는 실제 알기 어렵다. 사실기는 <삼국사기>에 '백제의 여증이 남잠성에,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에 주둔하고 당군을 괴롭혔다.'라는 기록을 토대로 두시원악을 역사학자 이병도가 청양군 정산면으로 비정한 것에 근거해 좌평 정무가 두릉윤성의 수장으로 기록해 놓은 것 같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통시적으로 고찰하면 사비성 함락 직후 남부여군은 나제 간선 도로망에서 신라군의 보급로 차단에 주력한 점을 고려하여 두시원악을 금산군 부리면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유력하다. 참고로 부리면 일대의 남부여 대 지명이 두시이현으로 '두시'라는 접두어를 쓰고 있는 기록상 남부여 유일의 지명이다.  

 

산성 안내판. 성의 둘레가 560m라고 한다. 계봉산성은 규모면에서 열이현의 치소로 사비도성 북방 방어성의 중심으로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두릉윤성에 대한 비정은 청양군 장평면 적곡리산성과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판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장기 농성으로서 이곳 계봉산성은 적합하지 않다.

 

남문

 

남문 좌측의 남벽

 

남문 부근 우측의 평탄지

 

산성 내부에서 바라 본 남문

 

남문 부근 좌측의 평탄지

 

동벽 부근에서 약수터 가는 길이 나 있다. 성문터라기 보다는 동벽을 허물고 만들어진 산책로로 사료된다.

 

남문

 

산성 동쪽. 지도상에는 승수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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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동쪽

 

남문 우측의 평탄지

 

 

남벽 부근의 평탄지

 

내성 장대지 가는 길에 제단이 있다. 여기서 잠깐 남부여 부흥군에 대한 념을 올린다.

 

내성 오르는 길에 남문 부근을 바라 보다. 계봉산성이 요지임은 분명하나 규모면에서 장기 농성으로는 부족하다. 두릉윤성은 장기농성으로 사료되는 바, 계봉산성을 두릉윤성으로 확신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내성에서 남방을 조망하다.

 

내성 장대지(평탄지)에는 민묘들이 자리잡고 있다.

 

정상 표지석

 

삼각점

 

정상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남부여 부흥군의 성스러운 산인 칠갑산(560m)과 능선이 보인다. 여기에서 칠갑산을 조망하면 이곳 계봉산성은 칠갑산 정상 남쪽 아래의 적곡리산성을 동쪽에서 방어하는 보조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남방을 바라보면 우측 산이 눈에 띤다.

 

내성에서 고도를 조금 낮추어 북방으로 진입하면 평탄지가 계속 이어진다. 산성의 전체적인 윤곽은 누에고치를 닮은 내외 이중산성으로 남벽이 200m로 장축이라고는 하나, 전체적으로 남북이 길며 동서가 짧은 타원형이다.

   

북벽 부근의 평탄지

 

서벽 부근의 평탄지

 

서벽 석축의 흔적

 

서벽 평탄지

 

동벽 아래

 

외성 서벽으로 내려가는 길

 

서벽 부근에서 내외 이중성임이 확연하다.

 

남벽으로 가는 외성 평탄지

 

서벽에서 바라 본 칠갑산 전경. 아래가 정산면 소재지이다.

 

서남벽 부근의 평탄지

 

서벽 부근의 돌 제단(?)인가 돌 의자인가?

 

안내판

 

기와 조각

 

서벽 외성의 평탄지

 

기와 조각

 

남문 부근으로 되돌아왔다. 산성의 동쪽.

 

동벽 산책로로 내려오면서 되돌아 본다.

 

한컷 더.

 

동벽 아래에서 바라 본 좌측의 미궐산 자락과 우측의 승수봉

 

동벽 아래 약수터가 보인다.

 

산성 외부에 있는데 부흥군의 식수로도 사용했을까?

 

약수터 옆의 나무들

 

산성의 동벽을 조망하다

 

 

 

 

 

동벽 아래 산책로

 

동벽의 석축 흔적들

 

 

 

남쪽의 앵봉산 아래 서천공주간고속도로가 보인다. 고속도로 바로 서북방에 벌초막토성이 있어 사비성이나 적곡리산성을 동쪽에서 비호하고 있다.

 

산성의 동남방

 

 

 

산성 입구로 가는 산책로

 

하산길에 처사 서산정공의 묘에서 바라 본 계봉산성

 

정공묘에서 바라 본 서녁의 칠갑산 전경

 

처사 서산정공의 묘

 

산성 답사를 마치고 서정리 9층 석탑을 보기 위해 정산면 소재지로 향했다.

 

 

 

 

석탑가는 길에 바라 본 계봉산성 전경

 

서정리 9층 석탑

 

안내판

 

석탑과 계봉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