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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남부여부흥전쟁

청양 두솔성(豆率城) : 법왕이 기우제를 지내며 사비도성을 예비하다

<2011년 2월 7일>

 

 

표지사진 - 칠갑산 정상에서 바라 본 우측의 형제봉. 두솔성은 적곡리 절골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이곳 칠갑산 정상과 형제봉 능선들이 모두 두솔성의 경계이다. 형제봉에서 한 능선이 절골 계곡아래로 향하며 산성을 형성한다. 


법왕 원년(599) 겨울 12월에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놓아 주고,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법왕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중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큰 가뭄이 들어 왕이 칠악사(漆岳寺)에 가서 기우제를 지냈다. 여름 5월에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법(法)이라 하였다. <백제본기>


 <삼국사기>에 나오는 남부여 법왕의 기록은 위 기사가 전부다. 법왕은 사냥도구를 태우고 살생을 금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짧은 재위기간에 왕흥사를 창건하고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살생을 금하고 절을 창건하였으니 시호대로 법을 실천한 왕이었다.

 그런데 그의 짧은 행적 중에 특이한 점은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낸 점이다. 고대에는 왕이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으면 왕을 희생하는 풍습이 있었다. 당시 남부여는 불교를 받아들여 이러한 고대 풍속이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민심 수습 차원에서 정적들이 법왕을 제거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렇다면 칠악사는 어디인가? 이청의 <칠악사를 찾아서>라는 글을 보면 칠악은 칠갑산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칠악의 칠(漆)자가 강희자전에 칠(七)자와 같은 자로 나오고, 악(岳)자 또한 처음 시(始)자와 같은 자로서 처음의 뜻이 있는 갑(甲)자와도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칠악의 뜻도 그러하거니와 칠갑산은 사비도성의 북 현무 자리로 이 일대 산 중에는 으뜸이면서 왕이 순행하기에도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비에서 기우제를 지낸다면 칠갑산 말고는 달리 지낼 곳이 없다. 지리적으로 칠악사가 지금의 칠갑산 산록에 위치한 사찰이라는 것은 상식 수준에서 유추해 보아도 자명할 것이다.

 한편 사비도성 금강 북안에 왕흥사가 있다. 왕흥사 뒷산에는 잠성이 있어 사비를 보위한다. 왕흥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은 잠성 또한 축조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큰 가뭄이 들어 사비 일대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법왕은 기우제를 지내러 칠악산 즉 지금의 칠갑산을 순행한다. 그의 순행로는 사비 동북방의 왕진나루터로 추정된다. 말 그대로 왕이 간 곳이다. 이곳에서 양화달천과 미당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칠갑산이 나온다.

 법왕은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금강 이북을 중시한 듯하다. 특히 나제의 위협이 점증하던 시기에 사비도성의 비상 대안성으로 금강 이북의 칠갑산을 중시했던 것 같다. 비록 법왕은 단명한 비운의 인물이지만, 후일 남부여 부흥군의 근거지가 이 일대였음을 감안한다면 혜안이 있었던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왕흥사 창건과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만으로 법왕이 칠갑산에 사비의 비상시 산성을 축조한 것으로 곧바로 연결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후 정황은 칠갑산에 두솔성이라는 산성을 쌓은 것만은 추정된다. 


현 서쪽 15리 각산에 두솔성이 있다. 자비성이라고도 한다. <대동여지지>


 지금의 청양군 정산면은 남부여 열이현으로 두릉윤성이 위치한 곳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15리 각산에 두솔성 내지 자비성이 있다고 <대동여지지>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각산은 어디인가? 바로 지금의 칠갑산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6년 조> 기사에는 각산성 축조 사실이 나온다.


무왕 6년(605) 봄 2월에 각산성(角山城)을 쌓았다.


 일반적으로 무왕 6년(605)에 축조한 각산성은 임실군 관촌면 오원천 양편 기슭에 뿔처럼 솟아 있는 삼각 지점의 산성 즉 대리산성·배뫼산성·방현리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왕은 사비 남쪽 즉 금강 남안을 중시하여 익산 미륵산 아래 왕궁리 일대로 천도를 꿈꾼 인물이다. 그 결과 반도 남부 지방의 서부 전선을 중시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로 유추컨대 각산성은 임실군 관촌면 일대에 구축한 남부여의 2차 방어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칠갑산을 각산으로 기록한 <대동여지지>의 힌트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남부여 상황을 고려하면 <대동여지지>에 나오는 각산의 두솔성이 <삼국사기>의 각산성과 일치할 가능성이 높다.


칠갑산은 현 서쪽 16리에 있으며, 옛성의 터가 있는데 자비성이라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정산현 산천 조>


고성(古城)이 칠갑산에 있는데, 본래는 도솔성·자비성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정산현 성지 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두솔성은 도솔성이 와전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솔은 ‘도솔천’에서 나온 말로 도솔천은 불교의 이상 세계를 말한다.


도림사는 칠갑산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정산현 불우 조>


 칠갑산에는 도림사가 있다. 도림사는 폐사되었다. 73년 지표조사에서 ‘도림’이란 명문 와당을 수습하여 이곳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도림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림이란 이름은 ‘도리천’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즉 ‘도리천’은 ‘도솔천’의 다른 말이다. 이 도림사가 바로 법왕이 기우제를 지낸 칠악사로 추정된다.

 ‘칠악산=칠갑산=각산’과 ‘두솔=도솔=도리=도림’은 당시 남부여가 지금의 칠갑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완성하려는 의도가 녹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무왕을 비롯한 일단의 세력은 사비의 남주작에 해당하는 미륵산을 중심으로 만경강과 동진강 일대의 평원을 중시하였다. 각산성 축조는 법왕의 계획을 최대한 축소한 형태로 마무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흥사와 각산성은 법왕이 동시에 시작한 역사로 그 임무를 무왕에게 일임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칠갑산 두솔성이 주류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문무왕 3년(663) 5월 백제의 옛 장수인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인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세우고, 웅진성(熊津城)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인궤(仁軌)에게 검교(檢校)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로 삼은 조칙(詔勅)을 내려 이전의 도독(都督)을 맡았던 왕문도(王文度)의 무리와 우리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싸울 때마다 진영을 허물어 향하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음이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이미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렀으며, 배반하고 도망한 자들도 불러서 세력이 자못 늘어났다. 인궤는 유인원과 함께 합쳐서 잠시 갑옷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바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조칙을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보내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金庾信) 등 28명의 장군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쳐서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는데,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서 전투의 공을 따져 상을 차별하여 주고 크게 죄수를 풀어주었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조>


 도침을 죽인 복신은 663년 5월 웅진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한다. 당시 웅진성에는 낭장 유인원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나당의 구원병이 웅진성으로 치닫자 그제서야 복신은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나당군은 부흥군의 근거지를 토벌할 결심을 하고 군사 총 동원령을 내린다. 대방주자사 유인궤는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고, 당 고종은 우위위장군 손인사가 이끄는 40만을 덕물도로 파견하였다. 기록에는 웅진성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덕물도에서 지금의 남양만~아산만~삽교천과 무한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내포를 직접 공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들과 함께 두릉윤성과 주류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는 나당군이 내포의 북과 남에서 양동작전을 구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로써 남부여 부흥군도 최후를 맞이한다. 하지만 오서산과 봉수산 즉 임존성 일대의 남부여 부흥군을 완전히 토벌하지는 못한 것으로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라군은 지수신이 지키는 임존성을 재차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설리정으로 돌아와 전투를 마무리한다. 결국 임존성은 당나라 군대가 함락시킨다. 지수신은 남부여 출신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사탁상여(沙吒相如) 등의 공격을 받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주류성이 피성(김제)과 가까운 부안의 우금산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보면 주류성이 두릉윤성과 지근거리에 있는 산성으로 이해된다. 이는 남부여 부흥군의 근거지가 금강 북안의 칠갑산 자락과 내포임을 의미한다. 특히 임존성과 두릉윤성은 <삼국사기 잡지 지리 조>에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어 주류성이 칠갑산 자락일 가능성은 높다.

 그리고 <삼국사기>가 기록한 당시의 전쟁 배경 또한 금강 이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주류성을 부안의 우금산성으로 본다면 전선이 무한히 확대된다. 신라군은 양분하여 전쟁을 치룬 것이 된다. 하지만 이는 전쟁의 전개 과정을 무시한 결과이다. 전투의 전개가 두릉윤성→주류성→임존성으로 이어지는 루트임을 감안하면 주류성은 두릉윤성과 임존성과는 가까이 있는 것이 합리적인 분석이다. 따라서 길이가 4.5km에 이르고 상단의 넓이가 5~10m인 두솔성이 주류성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웅진성이나 사비도성의 둘레가 2km 남짓한데 두솔성의 규모는 그 배에 가깝다. 이는 두솔성이 보통의 산성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렇게 공들여 쌓은 산성은 남부여 입장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두솔성과 매우 가까운 부여군 은산면 별신당에는 도침과 복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별신제 유래에는 복신이 등장한다. 이는 두솔성이 복신의 근거지였던 주류성임을 짐작케하는 일화이다.

 그리고 두솔성이 도솔성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실제 음운변화는 그 역일 가능성도 있다. 즉 주류성→두류성→두루성→두솔성→도솔성의 변화 과정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두솔성의 솔(率)자는 발음이 ‘율’ 내지 ‘루’로도 읽힌다는 사실이다. 즉 최초 두솔성은 두루성으로 표기한 것인데, 이 한자 발음을 솔로 읽어 두솔성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솔성의 어감이 도솔과 가까워 조선조에 들어와 도솔성으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많은 정황들이 칠갑산 두솔성을 주류성으로 가리키고 있다.

 

* 필자는 부여 우금산성편에서 우금산성을 중심으로 주류성을 논한바 있다. 이는 <일본서기>의 피성을 근거로 서술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논한다면 청양의 도솔성이나 우산성이 주류성일 가능성도 높다. 물론 홍성의 석성산성 또한 주류성일 가능성도 있다.

 

 

칠갑산 절골계곡 들어가는 입구. 절골에서 적곡리라는 지명이 나왔다고 소설가 이청 선생은 <칠악사를 찾아서>라는 글에서 언급하고 있다.

 

도림로로 해서 칠갑산 정상을 가는 루트이다.

 

도림사지 안내문

 

도림사지 3층석탑 안내문

 

 

 

소류지 댐

 

 

 

 

 

댐을 자나자 바로 산성 입구가 나온다. 좀은 당혹스러웠다. 계곡 우측의 성벽 잔재.

 

무심코 지나치면 너덜지대로 착각하기 쉽다.

 

 

 

산책로 좌측에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사실 남부여 당시의 축성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여말 선초에 금강변에 침입하는 왜구를 대비하여 쌓은 장기 농성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재축한다 하더라도 남부여 대의 산성에 기초하여 쌓았을 것이다.

 

계곡 좌측까지 축성의 흔적이 보인다.

 

등산로는 무심코 성벽을 지나간다.

 

두솔성 축성 전경

 

되돌아서 성벽의 흔적을 더듬다.

 

계곡 우측의 성벽 잔재

 

계곡 우측의 성벽은 형제봉에서 절골 계곡을 향하는 제일 험한 능선을 따라 축성하였을 것이다. 고대에는 수문터 자리도 있었을 것인데 시간의 흐름에 여느 계곡 처럼 되었구나!

 

계곡 상류. 걷보기에 칠갑산은 완만하나 속의 계곡은 제법 험하다. 겉으로는 태연하나 속으로는 질풍같은 충청인의 기질과 칠갑산은 그대로 빼다 닮은 것 같다.

 

뒤돌아서 계곡 우측의 산성 잔재를 다시 더듬어 본다.

 

이정표. 도림로가 칠갑산 정상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오르는데 1시간, 내려오는데 40분이면 족하다. 정상가는 길이 도림사지 가는 길이다.

 

암석의 무늬가 신기하여 찍어 보았다.

 

도림사 계곡

 

도림사지가 보인다.

 

도림사지는 계곡을 축성하여 조성해 놓았다. 전체적으로 두솔성의 내성으로 볼 수도 있겠다.

 

수문과 수로. 이청 선생의 글에 보면 이 주위에 거대한 수로가 확인된다고 한다. 도림사는 보통의 절은 아니다.

 

축성벽

 

도림사지는 두솔성의 내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도림사지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의 평지는 눈대중으로 보아도 2,000평 이상은 되어 보인다. 남부여 법왕은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이곳이 사비도성의 비상 장기 농성으로 생각하였을까? 아니면 서동 무왕의 의견대로 미륵산 일대로 천도하는 것이 대세일까? 기우제를 지내도 비는 오지 않았다. 사비의 민심은 더없이 흉흉해졌을 것이다. 정적들은 이를 기회로 본 것일까? 기우제를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왕은 죽음에 이른다. 당시 부여 궁정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지 궁금해진다. 

 

도림사지

 

도림사지 전경

 

안내문

 

수문. 이는 최근에 만든 것이다. 축성 당시에는 아래 수문을 통해 배수했을 것이다.

 

도림사지. 두솔성은 도림사지 뒤산 능선을 휘감으며 칠갑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도림사는 폐사되었지만 이후 민가들이 밭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그 때의 집터인가?

 

도림사지 2단 평지에는 3층 석탑이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지표하고 있다.

 

도림사 계곡

 

3층석탑

 

 

 

괘불대 지주석(?)

 

석등부재(?)

 

안내판

 

3단 축대

 

 

 

3단 축대 오르는 길

 

2단 평지에 서있는 3층 석탑

 

3단 평지. 이곳에는 어떤 건물이 서 있었을까?

 

정상가는 길은 3층 석탑에서 좌측으로 난 길이다. 3단 평지 약수터 뒷길로는 가지 마시길... 

 

이정표

 

도림사에서 칠갑산 정상가는 능선은 두솔성벽이다. 세월의 흐름에 퇴색하였지만 희미하게나마 성벽임을 알리고 있다.

 

대립시대에 만들어 놓은 참호같다.

 

등산로. 성벽 길이다. 하지만 알기 어렵다. 필자는 산성으로 인식하기에 성벽으로 추정할 뿐이다.

 

여기도 마찬가지...

 

저 앞에서 천장로와 만난다.

 

이정표

 

천장호 가는 길. 천장로와 도림로 만나는 이곳에는 축성의 흔적이 눈속에 묻혀있다.

 

 

 

정상가는 길

 

정상의 쉼터

 

형제봉 가는 능선

 

칠갑산 정상

 

절골 계곡으로 두솔성은 이 계곡을 포곡식으로 축성한 산성이다.

 

형제봉 가는 지천로

 

이정표

 

등산 안내도 (세로)

 

등산 안내도 (가로)

 

탐방로 거리와 소요시간

 

절골 계곡으로 두솔성은 이 계곡을 포곡식으로 축성한 산성이다. 좌측 능선이 필자가 올라 온 도림로이다.

 

절골 계곡 전경. 우측이 형제봉, 좌측이 도림로. 두솔성은 정상을 기점으로 절골 계곡을 포곡식으로 감싼 산성이다.

 

산장로. 제일 완만한 코스로 봄철 산행에 좋다. 버찌가 완전히 익을 무렵이면 산책로가 버찌 열매로 온통 검어진다. 대치와 천문대가 나온다. 물론 마지막에 계단이 좀 가파르다.

 

천장로. 천장호가는 길이다.

 

산장로와 천장로가 감싼 계곡

 

산장로 가는 계단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