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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론/남부여부흥전쟁

예산 임존성(1) : 남부여 부흥군의 최후의 산성

<2011년 2월 28일>

 

 

표지사진 - 임존성 장대지(지금은 헬기장) 부근의 암벽에서 바라 본 무한천 상류와 금북정맥의 능선

 

 

임성군(任城郡)은 본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대흥군(大興郡)이다. 영현(領縣)은 2개이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 임성군 조>

 

임존성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소재지 뒷산인 봉수산(鳳首山) 일대의 산성이다. 주류성과 더불어 남부여 부흥군의 2대 성지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임존성은 <삼국사기 잡지 지리 임성군 조>에 명확하게 위치가 나와 있어 이견이 없다.

 

사비 도성이 함락되고 웅진성에서 의자왕이 항복하였지만, 남부여가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주류성에서는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 동생인 복신이, 임존성에서는 흑치상지가 남부여 부흥의 기치를 내걸었다.

소정방(蘇定方)이 百濟를 평정하니, 흑치상지는 휘하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소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병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였다. 흑치상지는 이를 두려워하여 주위의 추장(酋長) 10여 인과 함께 달아났고, 도망친 이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任存山)에 의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다. 열흘이 되지 않아 돌아온 자가 3만이 되었다. 소정방은 병사를 이끌고 흑치상지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니 마침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삼국사기 흑치상지 열전>


태종무열왕 7년(660) 8월 26일에 임존의 큰 목책을 공격하였으나 군사가 많고 지세(地勢)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서 깨뜨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

 

흑치상지는 남부여 서부 사람으로 달솔 겸 풍달군의 장수를 겸하고 있었다.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지만, 소정방의 의자왕에 대한 처우와 당나라 군대에 의한 노략질에 분개하여 10여 명의 부하 장수를 이끌고 임존성에 주둔하며 3만의 군사를 모았다. 이에 놀란 나당군은 임존성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도, 무열왕의 신라군도 임존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작은 방어 목책만 깨뜨리고 회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흑치상지는 주류성의 복신과는 달리 결사항전의 태도는 없었다. 결국 당나라 황제의 회유에 넘어가 661년 무렵에는 유인궤에게 투항하고 만다.

흑치상지가 떠난 후에도 임존성은 남부여 부흥전쟁의 철옹성으로 남아 있었다. 복신의 부흥군은 주류성과 임존성을 근거로 하여 부흥 전쟁이 끝나는 663년 10월까지도 나당군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즉 백강전투와 이은 주류성 함락에도 불구하고 임존성은 굳건히 버틴다. 이때의 장수가 바로 지수신이다. 

 

문무왕 3년(663) 5월 백제의 옛 장수인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인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세우고, 웅진성(熊津城)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인궤(仁軌)에게 검교(檢校)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로 삼은 조칙(詔勅)을 내려 이전의 도독(都督)을 맡았던 왕문도(王文度)의 무리와 우리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싸울 때마다 진영을 허물어 향하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음이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이미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렀으며, 배반하고 도망한 자들도 불러서 세력이 자못 늘어났다. 인궤는 유인원과 함께 합쳐서 잠시 갑옷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바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조칙을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보내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金庾信) 등 28명의 장군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쳐서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는데,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서 전투의 공을 따져 상을 차별하여 주고 크게 죄수를 풀어주었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조>

 

이후 당나라 군대가 임존성이 위치한 예산과 홍성 일대(지금의 내포 지역)에 지심주를 두고 끊임없이 공격한 후 어렵게 임존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최후까지 항전한 임존성은 바로 내포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산군 광시면 장전리에서 바라 본 임존성. 우측이 임존성이며, 좌측은 내상산(384m)으로 임존성의 남쪽에 위치한다.

 

광시면 마사리로 가면 남문 입구까지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다. 등산할 시간이 없어 편법으로 올라간 것이다. 광시면 동산리 대련사 방면으로 오르는 길을 권하고 싶다. 남문 우측의 남벽

 

남문 좌측의 남벽

 

남문을 올라서면 웅덩이가 나온다.

 

남문에서 좌측 성벽 길로 먼저 돌아보았다.

 

남문과 남벽 일대

 

남벽 아래로 자동차로 올라온 마사리가 굽어 보인다. 멀리 남서쪽으로 내포의 진산 오서산이 구름에 드리워져 있다.

 

보수를 해서 그런지 남벽으로는 고성의 정취를 느낄 수가 없다.

 

 

 

임존성 남쪽의 내상산. 남문으로 오르는 임도가 보인다. 임도는 코너 돌기가 험해서 마사리에 주차해두고 올라도 좋을 것 같다.

 

남벽과 내상산

 

임존성의 남쪽인 예산군 광시면 일대. 광시면은 한우타운으로 유명하다.

 

안내문

 

봉수산 등산 안내도. 대흥면 소재지에서 오르는 길을 중심으로 안내하고 있다.

 

 필자는 대련사 방면이 좋다고 생각한다.

 

임존성은 성벽따라 완전히 한바퀴 돌 수 있다. 멋진 산책로이다. 필자는 오늘이 세번째 방문이다.

 

남쪽 일대

 

우물지

 

남벽과 내상산

 

 

 

 

 

남쪽의 광시면 일대. 정면 중앙 대략 세번째 능선 제일봉이 천태산(262.5m)으로 소구니석성과 천태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동남쪽으로 금북정맥이 보인다.

 

남쪽의 광시면 일대

 

남벽 중에서 고성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우측의 내상산과 멀리 금북정맥이 힘차게 남서쪽으로 주행하고 있다.

 

 

 

임존성은 봉화산 남쪽 두 봉우리의 8부 능선을 감싼 테뫼식 산성이다. 둘레가 2.4km인 거대 산성이나 포곡식이 아닌 테뫼식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거대 산성은 포곡식이나, 임존성처럼 테뫼식으로 축조된 경우는 더물다. 포곡식 보다는 테뫼식 산성의 외벽 규모가 높아 방어에 유리하다. 그런데 산정에 쌓은 테뫼식인 경우 물이 부족하여 장기적인 싸움에는 불리하다. 그런데 임존성은 봉우리 8부 능선에 우물지가 있어 물 부족은 해결할 수 있어 굳이 포곡식으로 산성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동남쪽으로 무한천 상류와 금북정맥이 보인다.

 

 

 

남쪽의 광시면 일대와 천태산성 및 소구니산성

 

산성 남쪽의 마사리 일대

 

남서벽 모퉁이 돌아 되돌아본 내상산

 

서벽 구간에서 바라 본 광시면 일대

 

마사리 일대

 

서벽 오르는 구간

 

사진 중앙의 제일봉에 축성한 천태산성과 소구니석성. 청양 방면에서 공격하는 나당군을 지키는 임존성의 보조산성으로 사료된다.

 

산성의 서남쪽 (오서산 방향). 사진 좌측 오똑 솟은 봉우리가 예산군 광시면과 홍성군 홍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초롱산((340m)이다.

 

산성의 남쪽(광시면 방향)

 

산성의 남쪽으로 청양의 우산성과 부여 은산면의 당산성을 거쳐 고대 남부여 사비도성으로 통하는 길이다. 지금의 29번 국도(예산 광시면~부여읍)과 동일한 루트이다. 나당군은 29번 국도와 같은 길로 북으로 임존성을 위협하였다. 사료상 특히 <삼국사기>를 보면 주류성이 칠갑산 주변의 두릉윤성과 이곳 임존성 사이에 위치하는 산성인 것으로 추론된다.

 

오서산 방향. 오서산은 구름에 드리워져 잘 보이지 않는다.

 

서벽구간. 임존성은 서벽과 동벽구간이 짧고, 남벽과 북벽 구간이 긴 타원형 테뫼식 산성이다.

 

남쪽 광시면 일대로 예당호 상류. 예당호는 삽교천의 지류인 무한천 상류를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필자는 당나라는 수군을 동원하여 남양만~아산만~삽교호~무한천을 거슬러 임존성을 공격하고, 신라군은 육군을 동원하여 웅진성~두릉윤성~우산성~소구니석성 및 천태산성을 거쳐 임존성을 공격한 것으로 추론한다. 즉 나당군은 남북에서 임존성을 협공하였을 것이다.

 

서벽 중간 지점

 

서벽 중간에서 임존성의 장대지로 추정되는 헬기장 방면으로 진입했다.

 

중간의 소나무

 

헬기장. 장대지나 건물터로 추정된다. 이곳이 임존성의 핵심 건물들이 소재한 것으로 판단된다.

 

산성 서쪽의 홍성읍 방향. 홍성읍은 임존성의 정서방에 위치하고 있다. 홍성읍의 진산인 일월산(394.3m)이 보인다. 일월산에는 백산산성이라는 고성이 있다. 홍성읍은 삽교천 중류로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물자가 풍부하다. 홍성,예산,아산은 내포의 중심지로 내포란 육지 내의 포구란 뜻이다. 남양만~아산만~삽교호~삽교천,무한천,곡교천을 따라 배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지금의 삽교호에서 삽교천을 따라 거슬러 서남쪽으로 가면 홍성이 나오고, 무한천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예산이 나오고, 곡교천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아산이 나온다. 그런데 세 하천 모두 평야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고도차가 거의 없을 뿐더러 밀물 때는 거의 노를 젓지 않아도 육지 깊숙히 배들이 들어온다. 그래서 육지 내 포구가 매우 발달하였다. 그래서 내포라 한다. 홍성읍 북쪽이 충남도청 이전 예정지로서 '내포신도시'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일한 사진으로 사진에 보이는 저수지가 홍양저수지이다. 저수지 우측의 조그마한 봉우리가 퇴뫼산이라고 한다. 산 이름에서 벌써 유추되지만 퇴뫼식 산성이 있다. 바로 홍성군 금마면에 소재한 송암리산성인 태봉산성이다. 주변 마을 이름들이 당곡, 야당말 등이 있는데, 당나라와 관련이 있었을 것 같다. 당나라는 남부여 부흥군을 신라와 더불어 제압하고, 구 남부여 땅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 관문이 바로 남양만 일대이다. 특히 남양만에서 바로 뱃길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내포이다. 당나라는 내포에 자신들의 식민지인 지심주를 건설하였다. 최초에는 홍양저수지 좌측의 낮은 봉우리인 홍성읍 구룡리 구산마을 뒷산인 사성(일명 고모루성)에 지심주의 치소를 두었으나, 사성이 홍양천과 삽교천의 합강 지점에 있어 방어에 유리하지만 고립될 위험이 있어 퇴뫼산 정상에다 치소를 옮긴 것이다. 지심주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라 주변 마을에도 '당'이란 이름이 남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당시 정황으로 남부여 부흥군의 임존성 자체의 방어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신라군이 임존성 공격에 소극적이었기에 함락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신라는 이미 당나라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나라가 지심주를 건설하는 장애물로 임존성을 삼은 것으로 보인다. 굳이 임존성이란 장애물을 제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신라 입장에서는 '당'이라는 큰 도둑이 따로 있기에 작은 도둑으로 하여금 감시케 하였을 것이다. 내포는 대륙의 산동반도와 매우 가까우며, 내포는 자체 해운과 물자가 풍부하여 만약 지심주 건설이 완료되어 이곳 백성들이 당나라의 통제를 받게 된다면, 삼한통일은 애시당초 물 건너갈 뿐만아니라 당나라는 지심주를 바탕으로 신라까지 정복하려고 덤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심주를 두고 삼국(당, 남부여, 신라)의 입장은 이처럼 첨예한 것이었다.

 

헬기장 동쪽의 조망 바위에서 바라 본 예당호 상류와 금북정맥

 

광시면 일대

 

아래로 남벽 구간이 보임

 

예당호가 보인다. 임존성은 아래 능선 8부선을 휘감아 북벽과 동벽을 이루며 우측의 남문까지 이른다.

 

남벽과 남분 부근. 마시리에서 올라오는 임도도 보인다.

 

 

 

 

 

내상산

 

다시 한번 홍성읍 일대를 굽어본다.

 

서북방 방향을 보려니 북쪽의 봉수산 능선이 가로 막는다.

 

홍양 저수지와 멀리 우측의 일월산이 보인다.

 

북벽을 향하여...

 

~ 예산 임존성(2)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