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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장미산성(2) : 북부여가 반도의 중심부에 부도인 국원성을 건설하다 정상 가는 산책로  정상의 성벽까지 참호는 이어진다.      정상에도 민묘 1기   서남쪽 괴산 방면의 속리산 줄기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뒷산은 평풍산 줄기. 우측 뒷산은 국망산(770.3m)~보련산 줄기임.   좌측 산이 파헤쳐진 곳은 충주 기업도시(지식기반형) 예정지이고 우측 산이 평풍산.   장미산성 안내판   장미산성은 장미산 산정을 중심으로 석축한 포곡식 산성이다. 둘레는 2,940m로서 상당한 규모의 고구려 계통의 산성이다.        삼각점   산정에서 동쪽을 바라 본 모습   장미산성 아래 동쪽으로는 남한강이 흐른다.   서북 방향의 보련산. 장미산성에는 전설이 내려온다. 삼국시절 보련산 서쪽 가마골에는 '보련'과 '장미'라는 오누이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타고난 장.. 더보기
충주 장미산성(1) : 북부여가 반도의 중심부에 부도인 국원경을 건설하다 에 따르면,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新羅)가 이를 평정하였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세우고 문무왕(文武王)때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2592보였다.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은 충주(忠州)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국원성(國原城)-미을성(未乙省)라고도 하고 탁장성(託長城)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에 따르면, "문무왕 13년 가을 9월에 국원성(國原城)[옛날의 완장성(薍長城)이다],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또는 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하였다],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 더보기
충주 누암리고분군, 탑평리7층석탑(중앙탑), 고구려비 네비게이션에 누암리 고분군을 치고 충주로 달렸다. 누암리 고분군은 중앙탑이 있는 충주박물관과 자동차로 5분여 거리에 있었다. 에 따르면,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新羅)가 이를 평정하였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세우고 문무왕(文武王)때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2592보였다.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은 충주(忠州)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국원성(國原城)-미을성(未乙省)라고도 하고 탁장성(託長城)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에 따르면, "문무왕 13년 가을 9월에 국원성(國原城)[옛날의 완장성(薍長城)이다],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또는 질암성(迭.. 더보기
옥천 자모실고개 남부여의 최후를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군대는 수로, 신라 김유신의 5만 군대는 육로를 통해 사비성으로 곧장 진격하였다. 남부여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義直)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나라.. 더보기
김제 벽골제 : 과연 '일본서기'에 나오는 심니거언인가? <2010년 6월 19일> <일본서기> 천지천황 원년(662년) 12월과 2년(663년) 2월의 기사는 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원년 12월 백제왕 풍장과 좌평 복신 등이 협정련과 박시전래진과 의논하면서 주유는 방어하고 싸울 장소이지만 전답에서 멀고 토지가 척박하고 농잠할 땅도.. 더보기
벽지산과 피성에 대한 고찰 벽지산과 피성에 대한 고찰 1. <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249년) 3월의 기사는 벽지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탁순군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7국(비자발, 남가라, 훼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을 평정하였다. 이어 군대를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 더보기
김제 성산산성과 서암동산성, 과연 남부여 부흥군의 피성인가? <2010년 6월 19일> 성산공원 앞의 70년대 건물 성산공원 입구 안내판 현재 김제시의 유일한 공원이지만, 과거 남부여부흥전쟁 시절 나당군을 진공하기 위한 임시 수도였던 피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전에는 남부여 벽골군의 치소로 기능하였다. 고산 최학규 선생 시비. 제목은 금산사. 김제 성산.. 더보기
하동 고성산성 : 가야 굴촌의 치소이자 역사의 뒤안길로 가는 은자의 비성 토요일(26일) 월드컵 16강전(우리나라:우루과이) 보자고 해 진주로 갔다. 2:1로 패했지만 만족한다. 다음날 오전 식사를 마치고 대전 가는 길에 하동 고성산성을 둘러보기로 작정했다. 오늘날 진주는 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비로소 거타주로부터 분리되어 청주(菁州)로 불리다가 경덕왕(재위기간 681~691년) 대에 이르러 강주로 개명했다. 고려대에 이르러 오늘날과 같은 진주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신문왕 대 청주는 영현이 둘이었다. 하나가 가주화현으로 오늘날 남강의 지류인 양천강 중상류의 합천 삼가면 일대로 비정되며, 다른 하나는 굴촌현(정덕본(正德本)에는 ‘굴재현(屈材縣)’으로 되어있으나, 주자본에는 ‘굴촌현(屈村縣)’으로 표기되어 있음)으로 역시 남강의 지류로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 하류에 .. 더보기